용서가 있어 사는 우리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by 교회사이


사순절 재의 수요일 후 토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4)


“그 때에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다.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 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께서, . . .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제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마가복음서 2:3-11)


용서가 있어 사는 우리 1.JPG photo by noneunshinboo


네 죄가 용서받았다 말하는 것과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말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울까요? 죄를 용서하는 것과 중풍병 환자를 걷게 하는 것, 무엇이 더 하기 쉬울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내면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 것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야 할 기적을 말하는 것,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 당연히 네 죄가 용서받았다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말로야 뭔들 못하겠습니까? 천 냥 빚도 만 냥 빚도 다 갚습니다. 백 번 천 번 용서한다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말한 것의 결과를 증명하기도 그렇다고 딱히 반박하기도 애매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생각하기로는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중풍병 환자를 다 보는 앞에서 일어나 걸어라, 나에게 진 그 천 냥 빚은 이제 잊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바로 현장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생각하기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들이 생각하기에 어렵다’ 하는 것을 하십니다. ‘저들이 생각하기에 쉽다’ 하는 그것, 하나님 한 분만 하실 수 있는 그 죄의 용서를 하실 권위를 바로 예수께서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저들에겐 그 어렵다는 것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에 중풍병 환자가 그 눕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나가는 기적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 즉 싸인(sign)입니다.

그러나 거기 대개의 사람들은 그 보이는 그것에만 관심할 것입니다. 여태껏 육체의 질병과 가난과 비참한 현실을 죄다 죄(sin)로 연결짓는 사람들, 지금까지 죄에 매이고 죄에 갇힌 삶을 사는 사람들,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시며 그 죄에서 해방시키려 오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외적 싸인으로서의 기적에만 저들은 매달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며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그저 놀람과 경이로움과 감탄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단지 의혹과 불신과 분노인 오늘 예수께서 보여주신 죄의 용서는 멈추지 않고 골고다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용서가 있어 사는 우리 2.jpg photo by noneunshinboo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서 23:34)


그리고 그들은 여전할 것입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마가복음서 15:31-32)


그리고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번엔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다시 묻겠다. ‘나는 죄인이다’ 하고 말하는 것과 ‘너는 죄인이다’ 하고 말하는 것, ‘나는 죄인이다’ 하고 말하는 것과 ‘나는 죄인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 그 가운데서 어느 쪽이 너는 말하기가 쉬우냐? 너는 누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손가락이 하늘을 가르키는데 그 손가락만 쳐다봅니다. 그 손가락 땅으로 내려 가르키는데 이번에는 하늘만 쳐다봅니다. 그 기적만 보고 그 싸인만 보다 정작 그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을 보지 못합니다.

용서가 이 땅에 왔는데 용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가복음서 2:17)


용서가 필요한 우리, 용서가 있어 사는 우리입니다.

사순절은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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