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재의 수요일 후 금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가복음서 1:17-18)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1)
“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네!”
역시 누가 뭐라해도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이야, 그래 저게 바로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인 이유지 . . . 남의 일이야, 남에게 하는 말이야 참 쉽습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일이면, 나에게 하는 말이면 쉬울까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리고 베드로는 어떻게 정든 곳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까요? 믿음! 질문하는 사람을 참 쑥스럽게 만드는, 정답으로 배웠고 들었고 알았고 그래서 자동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 앞선 무엇은 없었을까요? 그 믿음의 뒤에 선 무엇은 없었을까요? 무엇이 있어 믿음으로 자랐을까요? 무엇이 있어 믿음이 자라갔을까요?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계속 갈 수 있었을까요?
정 붙이고 살다보면 고향이라고, 그래도 아웅다웅하며 살던 정든 사람들, 하다보니 이력도 붙고 손에도 잡히는 정든 일, 뗄까 말까 붙일까 말까 그렇게 때려다 붙인 정(情)으로 어찌어찌 살다보니 살만해진 정든 이곳, 물론 그곳에 아쉬움도 부족함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 두고 떠날 만큼 참 모질고 지긋지긋하고 몸서리가 쳐지는 곳이 아닌 이상에는 야박스럽게 버리고 떠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뭔가 조금씩 나아질 기미가 보이는 듯도 하면 떠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딱히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앞으로의 미래를 누가 보장하는 것도 아니면, 그렇다고 버리고 떠난 그 이후를 내가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좋은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고, 이불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그 꿈이라도 꾸어볼까 싶어도 도통 꾸어지지도 않는다면, 여기를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버리고 떠나는 용기는 무모함 혹은 무책임함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동네 사람들, 고향 사람들, 세상을 잘 안다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너무 잘 안다 하는 사람들이 몹시 수군거릴 것입니다. 여기도 살만한데 왜, 지금도 괜찮은데 왜, 그러니 가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못하게 말립니다, 붙잡습니다.
나도 안 가니 너도 가지 마라.
너도 안 가니 나도 안 간다.
도대체 나를 말리는 건지, 자신들을 말리는 건지, 나를 위하는 건지, 자신들을 위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 그리고 그 떠난 길 계속 가는 사람은 몽상가 (夢想家), 이상주의자 (理想主義者), 혹은 상상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상상과 믿음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여기를 버리고 떠난 내가 저기를 향해 계속 갈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땅을 상상했을 것이고,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나라를 상상했을 것이고, 거기 그 새 땅에 거기 그 새 나라에 있는 나를 상상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를 매어두는 정을 떼고 앞으로 정을 붙일 저기를 상상하며, 정든 여기를 버리고 정들 저기로 길 떠나는 아브라함과 베드로는 상상의 사람,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베드로도 정든 곳을 버리고 떠난 그땐 몰랐을 것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손질하던 그물을 버리고, 잡은 물고기를 두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베드로는 앞으로 잘했다 칭찬도 받을 것이고 꾸지람도 물론 받을 것입니다. 남보다 윗자리 옆자리 좋은 자리에 앉지 않을까 기대도 할 것입니다. 스승에게 배운대로 남들을 가르치기도 할 것이고 이적도 보일 것입니다.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에 들뜨고 신이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호기롭게 ‘나는 절대 그런 놈이 아닙니다!’ 해놓고 스승을 혼자 두고 도망을 치기도 할 것입니다. ‘난 모르는 사람이오!’ 호된 배신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 닭 우는 소리에 그런 초라하고 비겁한 자신의 모습에 몹시 울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섭고 두려워 차마 골고다 그 언덕까진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 무덤가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맴돌다 남들 눈 피해 다락방에 숨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못난 제자들 중의 제일 못난 그래서 수석 제자는 커녕 그냥 제자라고 불리기도 민망할 베드로를 그래도 부활의 예수는 찾아와 ‘잘 있었느냐?’ ‘밥은 먹고 다니냐’ 하시며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실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 민망한 말씀에 염치없이, ‘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할 것입니다. ‘그럼 내 양들을 먹여라’ 그렇게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거기까지는 상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꿈도 꾸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분명 상상 속의 그 나라, 그 나라에 있는 나를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 꿈이 현실이 될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상상을 하고 꿈을 꾼다면 거기까지만 믿고 떠난다면 그것으로 지금 베드로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상상력을 죽이지 말고, 꿈을 애써 깨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일상에 믿음에 상상을 더하고 꿈을 더하고 살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수난의 길은 아픈 길이지만 거기를 여기로 상상하며 걷는 꿈길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