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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Mar 25. 2022

왜 난 안될까?
왜 우린 못할까?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세 번째 주간 금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21)


“. . .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 .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 . .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 .’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마가복음서 9:14-29)


photo by noneunshinboo


나만 그럴까? 나만 이런 생각 할까? 


왜 나는 안되는 걸까? 도대체 왜 나는 못하는 걸까?  

믿음이 없다! 기도가 없다!


믿는데, 왜 안되는 걸까? 기도를 하는데, 왜 못하는 걸까?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믿는다고 믿는데 왜 여전히 안되는 걸까?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왜 아직도 못하는 걸까?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나만 그럴까? 나만 이런 고민 할까? 

그럼 충분한 믿음과 충분한 기도, 그 기준은 무엇일까? 그 정도는 도대체 어디일까? 무슨 수를 써야 나는 거기까지 이를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어떻게 믿어야, 내가 얼마나 기도를 해야 그 충분한 양 그 충분한 수를 채워 내게 안되는 것 없고 내가 못할 것 없는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그런데, 

믿음이, 그리고 기도가 무슨 성냥개비를 ‘똑’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것도 아니고, 오이를 ‘딱’ 칼로 자르는 것도 아니고, 엿가래 ‘뚝’ 한 번에 부러뜨리는 것도 아니고, 똑 부러지고 딱 부러지게 믿고, 뚝딱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기도하고,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하나님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서 11:22-24)


저기 멀리 있는 산더러 여기 내 앞으로 당장 오라 말하고 의심 없이 믿으면, 정말 자고 나면 세상이 변해 있을까? 나는 그 산 속에 있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 산은 여전히 저기에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그러면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 잠을 자지 말고, 그냥 뜬 눈으로 지새우며 기도해야 했을까? 


하루 모자란 99일 기도는 그 하루가 부족하니 당연히 안될 것이고, 100일을 딱 채우면 조금 인색한 듯 보이고 그래 남보다 하루를 더 하면, 그래서 101일이면 그래서 하루가 남으면, 그러면 내가 기도한 그 이상의 것이 이루어질까? 정말 그럴까?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桓雄)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桓雄)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기(忌)한 지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忌)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신앙이 자연 숭배의 단계에 머물렀던 고대사회에서 곰과 호랑이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입니다. 그리고 쑥과 마늘은 주술적 효력을 갖는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곰을 자기들의 신성한 동물로, 그리고 상징물 즉 ‘토템’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신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자연 숭배, 그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는 토템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펑’하는 소리와 연기 속에 사라지고 나타나는 주술적 마술적 효력을 지닌 그 무엇이 아닙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왜 난 안됩니까? 왜 우린 못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어둔 터널 그 안에 머물게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그 터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왜 나만, 왜 우리만 이렇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그 터널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해서 어둔 터널 그 안을 살게 합니다. 




“. . .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 . . . 그 날이 어둠에 덮여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하셨더라면, 아예 그 날이 밝지도 않았더라면, . . .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욥기 3:1-10)


창자가 에이는 아픔과 고뇌, 낙심과 절망, 그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의 욥, 그 길고 깊고 짙고 캄캄한 어둔 터널 안에 앉아 울 기력조차 없는 욥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욥에게는 참 미안하고 치사하고 못된 짓이지만, 그의 슬픔과 고통이 나에게 적잖은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너 또한 그렇구나.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 .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마가복음서 14:35-36)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당신께서도 그러셨구나.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14:36)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구나,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셨구나, 죽기까지 사랑하셨구나. 그래서 그 길을 가실 수 있으셨구나.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기 42:2-3)


그래 그렇게 욥도 힘겹게 힘겹게 거기 어둔 터널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구나**. 


나 혼자가 아니어서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 

사순절입니다. 



* <삼국유사> 일연 지음, 이제호 옮김, 솔출판사, p. 68 

** 내년 2023년 사순절에는 욥기를 읽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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