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세 번째 주간 토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22)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리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마가복음서 9:30-32)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가복음서 8:33)
지난번 제대로 혼이 났었는데, 어떻게 또 물을까? 무슨 배짱으로 ‘안됩니다’ 하며 또 항의할까? 가만 있는 게 상책이다 싶어 그러는 건지, 그냥 저러시다 마시겠지 하는 건지, 알아들은 척이라도 해야 또 그런 말씀 하지 않으시겠지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이번엔 정말 알아들어서 그러는 건지, 잘 나서던 베드로가 이번엔 조용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조용합니다. ‘안됩니다!’ 그때의 베드로의 항의에 제자들의 소리 없는 동의라는 건지, 단체로 침묵시위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묵비권 행사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저들도 이젠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안다는 건지, 굳이 말이 필요할까 짓는 미소는 아니지만 침묵으로 그 깨달았다는 것을 스승께 알린다는 것인지, 지금의 침묵은 그래서 이해이고 공감이고 인정이고 동의라는 건지, 조용합니다.
이번엔 알아들었을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그러면 그렇지요. 몰라서 침묵입니다. 이럴땐 침묵이 금이다, 그래서 침묵입니다. 또 항의라도 하면,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냐 또 물어보면 정말 혼날까 싶어, 아는 것도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 혹시 알면 다칠까 싶어 모르는 게 약이다 싶고, 무심한 척 하는 게 낫다 싶어 조용합니다.
괜히 물었다가 그 말씀하신 그대로 되면 어쩌나 싶어, 정말 현실이 될까 싶어, 사실 그게 두렵습니다. 그냥 나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나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나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나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원하는 대로 그러고 싶은데, 물었다가 정말 그게 사실이 될까 싶어 하는 침묵. 그런 심정에서 하는 침묵이 아니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고난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고난받는 메시아(the Suffering Messiah)*. 선지자 이사야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게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십자가 그 최악의 사형대, 그 위의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맞을 메시아라니,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구원은 해방은 우리의 따뜻한 봄은 없다는 말인데, 그런 메시아는 없다는 말인데, 그것이 사실일까 제자들은 두렵습니다. 현실이 될까 싶어 무섭습니다. 내 입으로 그 말을 꺼내면 정말로 그렇게 될까 싶은 공포입니다. 그렇게 순순히 동의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고 난 후 이 천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받는 종’ 혹은 ‘고난받는 메시아’이라는 그 말, 그 개념은 너무 익숙하고 그래서 우리는 당연한 듯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 특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너무 낯설고 생소하고 이상한, 그래서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불가능입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하신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될까 봐,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깨닫기를 거부합니다.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그러니 예수께 묻지 못합니다. 물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믿음의 길에는 항상 어려움이, 고난이, 그리고 십자가가 따른다, 그러는데, 그렇게들 말을 하는데 사실 겁이 납니다. 그렇다는데, 정말 그럴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아멘’은 했지만 그러면 안되는데. 정말 나에게만은 그러면 안되는데. 지금 여기 우리도 그때 거기 제자들과 함께 침묵입니다.
고난받는 종, 고난받는 메시아를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과연 나의 가슴으로 그 메시아를 그리고 그 고난을 제대로 받아 안고 있는지, 나는 알아서 침묵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제자들처럼 몰라서 그러나 묻기 두려워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땅의 그 많은 무고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그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의 십자가, 지금도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세상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고난, 그 비참한 현실과 참혹한 죽음에 대해,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그 십자가에 대해, 그 십자가의 길 가시는 예수님 앞에 선 제자들처럼 나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그 말씀을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 안고 있는지, 그 길을 나의 길로 알고 가고 있는지, 지금 내가 이고 지고 끌고 가는 그 십자가, 그 무게를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이 모든 것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기 침묵하는 제자들과 함께 여기 침묵하는 나, 그리고 그 제자들과 나를 침묵 속에 바라보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침묵, 그리고 나의 침묵은 정말은 금이 되진 못합니다. 금이 되는 침묵, 금인 침묵은 따로 있습니다.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 예수님의 침묵.
그 길 끝에 다다라 제사장들의 모욕 앞에, 빌라도의 심문 앞에, 군인들의 고문 앞에, 그리고 골고다 언덕 위 오고가는 저들의 온갖 조롱 앞에서의 예수님의 침묵.
골고다 언덕 위 그 십자가의 침묵.
성 토요일(Holy Saturday)의 긴 침묵.
이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
그리고,
이 모든 침묵을 깨는 부활의 아침.
사순절, 금이 되는 침묵의 길입니다.
* 이사야서 52:12-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