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네 번째 주간 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23)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9:38-41)
“반대합니다. 그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를 따르는 사람,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 중의 한 명이 아닙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내 편이 아니라고, 우리 편이 아니라고,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 중의 한 명이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가 아니라고, 우리가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 사람과 그 사람들은 역시 내가 아니고 우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반대하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를 그리고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일까요? 아니면 경쟁심에서 질투심에서 그랬을까요?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일까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를까 아직 그 문제도 마무리를 채 짓지 못했는데, 갑자기 웬 객식구가 들어와 우리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다, 경계의 차원이었을까요?
제자들은 그 사람에게는 물 한 잔도 주기 싫은 모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자기들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자기들을 지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들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잔도 아까운 모양입니다. 그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 싫은 모양입니다. 있는 것도 빼앗을 기세입니다.
제자들은 ‘나누자’ 하고, 스승은 ‘더하라’ 하고.
제자들은 ‘따로 가자’ 하고, 스승은 ‘같이 가자’ 하고.
제자들은 ‘다르다’ 하고, 스승은 ‘같다’ 하고.
제자들은 ‘다르니 틀리다’ 하고, 스승은 ‘달라도 괜찮다’ 하고.
제자들은 ‘아니다’ 하고, 스승은 ‘맞다’ 하고.
제자들은 ‘우리 만’ 하고, 스승은 ‘모두 다’ 하고.
제자들은 ‘끊자’ 하고, 스승은 ‘잇자’ 하고.
제자들은 ‘나가라’ 하고, 스승은 ‘들어오라’ 하고.
제자들은 그 문 ‘닫자’ 하고, 스승은 그 문 ‘열라’ 하고.
제자들은 없는 벽도 ‘세우자’ 하고, 스승은 있는 벽도 ‘허물자’ 하고.
그래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답답하고, 스승은 그런 제자들이 답답하고.
제자들의 기준은 ‘나’와 ‘우리’, 그 ‘같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지만, 나와 ‘다름’ 그리고 우리와 ‘다름’ 그 ‘다름’에만 관심을 둡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 그리고 ‘우리’라는 ‘같음’입니다. ‘다름’은 ‘틀림’이고, 그래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과 가장 중요한 것,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악을 쫓아내는 그 일의 같음을 공유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의 선포라는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나 그리고 내가 속한 우리라는 그 협소한 동일성과 지엽적 같음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에 있어서의 그 ‘같음’을 보시고, 다름은 다양함으로 인정하십니다. 한 하나님의 한 가족, 한 아버지의 다르지만 같은 한 자녀, 한 형제 한 자매, 한 그리스도의 다르지만 같은 한 제자라는 것, 그것을 보십니다.
신앙의 길은 한 지붕 아래 다양한 몸의 꼴, 마음의 꼴을 갖고 있는 커다란 한 가족으로 걷는 길입니다. 그 걷는 걸음걸이의 모양도 다르고, 그 내딛는 발의 간격도 다르고, 그 걷는 속도 역시 다르지만, 누구는 늦고 어설프고 촌스럽고, 누구는 빠르고 노련하고 게다가 세련되고, 누구는 걷고 누구는 뛰고 누구는 다른 이의 도움으로 걷고, 그래서 다르고 너무 다르지만, 그러나 한 방향으로 따로 또 같이 걸으며, 서로를 지켜보고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에게 말을 걸어주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물 한 그릇 서로에게 건네며 함께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동행자로 함께 걷는 길입니다.
간장 종지 보다도 작은 제자들의 그 마음의 그릇으로 바다 같은 주님을 어찌 담을까, 그만 재고 따지고, 그 깊고 넓은 바다에 맨몸 맨마음으로 나를 비워 풍덩 그 은혜의 바다에 함께 빠지는 것이 어떨까요?
이 바다 내 것으로 만들겠다, 잔뜩 담아 내 것으로 하겠다, 그러나 그 들고 있는 그릇에 담긴 것은 몇 숟가락에 없어질 짠물 뿐, 그 바다가 아닙니다. 각자의 ‘나’와 ‘우리’라는 그 작은 그릇은 거기 서랍 속에 깊숙히 넣어 놓고, 그 그릇의 모양과 크기는 중요치 않으니, 함께 그 바다로 들어가 함께 놀면 어떨까요?
그리스도께서 여시는 그 문들, 있는 족족 닫고 잠그고, 그러다 나 들어갈 차례에 정작 그 문 닫으시면 어쩌려고 그럴까요? 나도 못들어가고 너도 못들어가게 하고, 그러다 남들은 다 들어가는데 뒤에 나 혼자 남으면 어쩌려고 그럴까요?
여기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지금 제자들도 읽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고 다투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전합니다. 좋은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시기하고 다투면서 하는 사람들은 경쟁심으로 곧 불순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15-18)
이 사순절을 지나 바울 사도처럼 열리고 넉넉해져 나도 성숙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