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스케이트 이야기-
마을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는 여러 가지이다.
겨울이 와도 아이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 앞 골목길에 나와 있다.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운동화 뒷굽으로 언 땅에 구멍을 내고,
구슬을 굴리느라 해지는 줄을 모른다.
구슬치기 말고도 딱지놀이, 팽이놀이 등은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항상 인기가 많다.
그래도 겨울이 되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놀이가 있다.
특히 날씨가 추워져서 눈도 오고,
얼음이 얼어야만 할 수 있는 놀이는 더더욱 몇 가지 안된다.
여름을 좋아하는 기세에게는
겨울방학이 오면 따스한 아랫목에 이불 덮고,
찐 고구마를 먹으며 동생들과 만화책 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유일하게 멀리 살고 있는 이모네 사촌동생들이 오면,
같이 놀러 나가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이모네 사촌동생들이 놀러 왔다.
물론 한쪽 손에는 각각 스케이트가 들어있는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다.
사촌들은 우리 집에 겨울방학 때만 되면 놀러 오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기세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릉 국제 스케이트장이 있기 때문이다.
거리도 소풍 때마다 태릉이나 푸른 동산까지 걸어서 가던 곳이기에,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어릴 적부터 기세와 동생들은 다른 집에는 없는 스케이트가 몇 개씩 있었다.
이모부가 스케이트 신발이나 축구화 등을 만드는 일을 해서이다.
스케이트 날이 없는 신발만 만드시지만,
자주 이모나 이모부가 알아서 기세와 동생들에게 완제품 스케이트를 가져다주시곤 했다.
기세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발 크기가 커져서,
스케이트가 안 맞는다고 기세를 이뻐하시는 이모가 오면 투덜댄 것도 한몫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세는 신던 스케이트는 대부분 동생들 물려줄 때 아깝다고 생각지 않는다.
동생들도 의례 기세가 신던 스케이트는 자신들 몫이 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늘도 투덜댄다.
보통 남자들이 타는 롱 스케이트와 여자들이 타는 휘겨스케이트는 모양과 색깔도 다르고, 보나 마나 오빠 스케이트를 물려받게 되면 여자인데도 거무튀튀한 롱 스케이트를 타야 하는 이유에서 입이 많이 나와있다.
기세네 마을에서는
겨울만 되면 아이들이 하는 놀이 중에 최고 인기 종목은 스케이트 타러 가는 것이다.
그것도 겨울방학을 하면 아이들의 특성상 좀이 쑤시는 방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일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스케이트는 대부분 가격이 비싸서 그런지 스케이트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흔치 않다.
그리고 대부분 입장료와 스케이트화도 가서 일정 금액을 내고 대여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스케이트장을 자주 가는 아이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집 근처 얼음이 어느 정도 얼려있는 곳을 찾아,
바닥에 썰매 날 부분을 철사로 이어 붙여 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기세는 불만과 함께 말이 많은 스케이트장에 데려가고 싶지 않은 여동생과 그래도 같이 데려갔으면 하는 엄마와 한참 실랑이를 한다.
엄마는 기세 손에 얼마큼 용돈을 쥐어주시며 여동생과 동생들을 부탁하신다.
용돈 때문에 여동생과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집 근처 썰매 타는 아이들을 지나 마을 앞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사촌들과 걸어가도 될 거리지만, 찬바람이 부는 날씨와 투덜대는 여동생의 잔소리에 하는 수없이 버스를 타고 스케이트장으로 향한다.
버스에 오르고 혹시나 정거장을 지나칠지 몰라 안내양 누나의 말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엄마가 쥐어주신 용돈을 챙겨온 기세는 확인차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입장료를 대략 알고 있는 기세는 군것질을 어떻게 사 먹을까 계획을 세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뿔싸!’
기세는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은 채 추운 버스 안에서 얼굴이 벌게진다.
몇 번을 뒤적여도 밑이 터져있는 한쪽 호주머니는 바뀌지 않았다.
옆집 누나에게 얻어온 꺼내기 쉽게 잠바 주머니에 넣어 둔 버스 회수권을 다시 꺼내본다.
다행히 그나마 손에 들고 있는 몇 장의 회수권이 전부인 것을 다시 확인하지만
불안해하는 기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동생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귀찮은 여동생은 왜 그러냐는 듯이 자꾸 캐묻는다.
벌써 태릉 국제 스케이트장 정거장을 지나쳤다.
뒤늦게 몇 정거장을 더 가서야
버스 안내양 누나에게 회수권을 내고, 동생들과 흙으로 된 비포장 버스 길 한쪽에 내린다.
길가 정류장 근처에는 허름한 가게를 제외하곤 주변은 허허벌판 논두렁이 전부였다.
동생들과 내리자 길 한쪽 논두렁에서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기세는 의아해 하는 동생 둘과 사촌 둘을 흙먼지를 몸으로 막아주며 흙길에서 잠시 생각한다.
저 멀리 논두렁 한가운데 기세 눈에 들어온다.
기세는 결심한 듯 가게 옆 논둣길로 먼저 걸어간다.
얼마 걸어가자 넓은 논두렁 중간에 얼음이 얼려있는 꽤 넓은 자리가 나타났다.
그곳은 벼베고 난 논두렁에 일부러(?) 물을 대놓고 얼려서 생긴 기세네 집 근처 논두렁과 비슷한 동네 아이들 놀이터였다.
동네 아이들이 썰매 등을 타는 곳으로 벌써 몇몇 아이들이 모여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기세는 국제 스케이트장은 사람이 많아 어른들에게 치여 제대로 타지도 못하고,
입장료도 비싸니, 사람 적고 싼 이곳에서 마음 놓고 타자고 동생들을 설득한다.
탐탁지 않던 아이들도 남은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 먹자는 이야기에 솔깃한다.
아이들과 달리 기세가 가장 맘에 드는 건 입장료가 무료인 것이다.
기세는 돈 한 푼없는 상황이라 이제 먹을 것만 해결되면 만사형통일 것 같았다.
기세는 아까 길가 허름한 가게유리창에 써진 라면, 가락국수, 떡볶이, 핫도그라는 글씨가 자꾸 아른거린다.
기세는 동생들이 스케이트 타다가 힘들어 지치고 배고프다고 하면,
불량식품 사 먹지 말고 집에 얼른 가서 따뜻한 밥을 먹자고 설득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금 타다가 배고프면 뭘 먹자는 기세와는 달리 동생들은 아까 그 가게 이야기를 하며 스케이트 신기도 전에 배고프다고 벌써부터 성화다.
기세의 머릿속에는 돈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동생들에게 하게 되면,
큰형으로서 동생들 네 명한테 망신을 당할 생각으로 안절부절이다.
그때 내 편을 한 번도 들어주지 않던 귀찮기만 한 여동생이 몰래 기세 뒤로 온다.
기세의 뒷주머니에 여동생이 손을 쑥 넣더니
“오빠! 엉덩이에 창피하게 뭐가 묻었어!”라며 깔깔 웃어댄다.
아니나 다를까 기분도 심란한 마당에 기세는 사촌동생들 앞에서 또 망신을 주는 여동생이 한없이 미웠다.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기세 얼굴을 보지도 않고
먼저랄 것도 없이 동생들은 스케이트를 논둣길에 던져놓고 가게로 뛰어간다.
안 따라갈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가게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간 기세 눈에는 예상대로의 모습이 펼쳐졌다.
동작 빠른 동생들은 대나무 꼬치에 꿴 어묵을 하나씩 들고, 어묵 국물을 따라 마시기 바쁘다.
흐뭇하게 쳐다보시던 가게 아주머니는 비닐로 싼 그릇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 여동생에게 건네주신다.
자리에 앉아 포크를 입으로 빨던 여동생은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으려는 듯 입 주위에 국물을 묻혀 가며 볼 양껏 떡을 집어넣는다.
동생들은 들판의 추운 겨울바람에 언 몸을 군것질거리로 채워 나갔다.
하지만 기세는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난 괜찮으니 너희들 많이 먹어라’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지금 기세는 가게 아주머니에게 어떻게 사정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들 배가 부른지
남아 있는 떡볶이 떡 몇 개를 보면서 기세에게 먹어 보라 한다.
공짜 어묵 국물만 연신 떠먹는 기세.
아침도 안 먹은 기세의 배는 국물만 양껏 마셔서 그런지 소리가 출렁댄다.
기세는 가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잠바 주머니 위아래 하나하나,
바지 앞 좌우 주머니, 엉덩이에 뭐가 묻었다던 그 뒷주머니까지.
헉, 그런데 뒷주머니에 뭔가 잡힌다.
꼬깃꼬깃한 종이 같은 것이 만져진다.
꺼내 가만히 펼쳐보니 오백원짜리 지폐 한 장.
지폐에 그려진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왜 이리 고맙고 우러러 보이는지.
그 돈이면 가게 아주머니에게 사정 이야기를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여동생은 빙그레 웃으며 기세에게
“오빠! 떡볶이 남은 거 내가 먹어도 돼?”
기세는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걸 느꼈지만, 처음으로 군것질거리를 여동생에게 양보한다.
다시 논두렁 둑길로 걸어가는 길에 기세의 배에는 출렁대는 오뎅국물만 잔뜩 먹은 소리가 싫진 않다.
기세는 누가 올려놓았는지 모를 둑 위 가마니에 여동생을 앉혀 놓고, 스케이트를 맨 먼저 신겨준다.
스케이트화는 꼭 끈을 조여매야 발목이 안 다친다는 당부와 함께,
힘껏 힘을 줘 두세 번 조여 맨다.
이 날은 남자 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아이인데도 피겨스케이트를 못 타고 기세에게 물려받아만 했던 롱 스케이트를 신은 여동생에게 열심이다.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다 기세와 동생들이 스케이트를 신고 나타나자,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섞여 모두 한참을 타고 놀았다.
어느새 동네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신고, 기세와 동생들은 썰매를 타고 있다.
기세는 빌려 탄 썰매에 여동생을 태우고, 뒤에서 밀어주기 바쁘다.
정신없이 놀아서였는지, 어느새 겨울 해가 뉘엿뉘엿 져간다.
기세는 안 놀아주던 여동생과 열심히 놀아줘서인지 더더욱 다리도 쑤시고,
동생들과 달리 더욱더 배도 고팠다.
이제는 기세와 동생들은 빨리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따뜻한 안방 아랫목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기세의 마음 한편에는 마지막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
그 걱정은 바로 얼마 안 남은 잔돈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잔돈 몇 푼으로는 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세는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할 상황이라고 털어놓기에는
어린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도 못하고 망설이며 쭈볏거린다.
또다시 미운 여동생이 기세 뒤에서 앞으로 나선다.
“오빠! 우리 다리근육도 풀 겸 집에까지 걸어가자!”
기세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