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유관순열사 이야기-
기세가 학교 앞에 자주 찾는 곳은 문방구와 책방이다.
문방구는 들어가서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하고 군것질거리도 사고 재미있다.
또한 주은이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책방도 재미있는 곳 중 한 곳이다.
그래도
책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름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친다.
먼저 창밖 진열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한번 쭉 보고,
요즘 관심 있는 추리소설인 셜록 홈스와 괴도 뤼팽에 관련된 책이 어디 있는지 위치를 보고,
말하기 쉽게 책 이름을 외우고 들어간다.
그리고 말하기 편한 같은 반 주은이가 가게 안에 있는지 기대도 해본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꽂혀있는 책을 마음 놓고 꺼내 펼쳐볼 수 없었다.
원하는 책을 말하면 꺼내주시기는 하지만,
서서 책을 받아 많이 읽기도 눈치가 보이고 시간이 지체되면 주변 시선이 따가운 것을 느낀다.
그래서 기세는 책방에 갈 때마다 조금씩 읽고,
다음날 와서 또 다음 쪽을 읽고 한 적도 많다.
기세는 책 사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책을 한 번 사서 여러 번 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책방 주인이 되면
앉아서 새로 나온 책을 읽고,
다 읽은 책은 다시 꽂아놓고,
다시 팔면 되는 거 같이 보였기 때문에 책방 주인이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기세의 어릴 적 꿈은
거창한 대통령도 과학자도 비행기 조종사도 아니다.
많은 꿈도 있었고,
계속 바뀌기도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지금은 책방 주인이 장래희망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기세와 친구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학교 앞 문방구와 책방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눈치다.
책방 진열장 앞에서 책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있을 흥미로운 일에 대해 신나하는 것 같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많다.
석양이 넘어 어둑해질 무렵이면 의례 수위 아저씨는 교문을 닫아걸고,
아이들을 내보내려 애쓰신다.
더 놀고 싶어 나가기 싫은 아이들은 수위 아저씨의 눈을 피해,
학교 건물에 몰래 숨어 아저씨와 원치 않은 숨바꼭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위 아저씨보다 무서운 게 있긴 하다.
부모님의 잔소리와 컴컴해지는 어두움이 무섭기도 하지만,
학교 안에 떠도는 무서운 소문에 대부분 일찍 집에 돌아가기 마련이다.
국민학교 복도에 있는 교실 창문 상단에는 학년과 반이 적혀 있다.
특히, 저학년은 1-11, 1-21 이렇게 오전, 오후 두 개의 반이 표시되어 있는 반이 있다.
교실은 적고 아이들은 많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둑해질 무렵이면 일찍 집에 가는 저학년이 없는 빈 교실은, 특히나 적막하고 학교 특유의 으스스한 기운이 남아 있다.
더구나 무서운 소문의 발원지가 바로 그곳인데,
저학년 반 입구에 들어가기 전 복도에 있는 유관순 열사 초상화 때문이다.
특히 여자아이들이나, 소문을 전해 들어 아는 아이들은 컴컴해지기 시작하면,
저학년 교실 근처에 가기를 꺼려 한다.
무서워하는 이유는 해지고 나서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초상화 앞에서는 어느 위치에서 봐도 본인을 계속 노려 본다는 점이다.
또한 초상화 옆으로 움직여 바라보면,
한쪽 눈으로 본인을 계속 노려보며, 무슨 말을 걸려고 입모양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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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추리물에 심취해 있는 기세는
이 사실의 진상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세와 용감한(?) 친구들 3명은 학교 안에 떠도는 소문의 사실이 너무 궁금하여 모의를 실행하기로 한 날이다.
운동장에 아이들이 줄어들자
기세와 친구들은 눈에 잘 안 띄는 운동장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교사 뒤에는 소각장과 쓰레기장 건물이 있다.
그 사이에 얼마 전 학생들이 반별로 집에서 가져온 신문지와 잡지 등 폐품들이 쌓여 있다.
폐품이 쌓여 있는 더미 틈 사이로 살금살금 쪼그려 걷기로 몸 숨길 곳을 비집고 들어간다.
각자 자기 자리 바닥에 두꺼운 책을 깔고, 둘러앉는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지 기세가 눈짓을 보내자
아이들이 신문지 등으로 서로 앞사람 머리 위를 덮어주기 바쁘다.
조금 더 어두워져야 하기에 수위아저씨의 눈을 따돌릴 숨을 장소로는 적합한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렸을까.
4명의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과 눈동자를
그것도 아무 말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보며 있는 것도 처음일 것이다.
드디어 해는 지고,
어둑해진 학교 운동장은 플래시가 없으면 방향 잡기와 걷기가 쉽지 않을 만큼 검게 변했다.
기세는 그렇게 어두워져 앞뒤가 구분이 안되어도,
어둠에 적응해서 인지, 학교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어서인지, 그렇게 당황스럽진 않다.
드디어 기세와 아이들은
저학년 교실 쪽으로 허리를 잔뜩 숙이고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이동한다.
교실 근처에 도달하자
사뭇 앞서기가 두려운 기세는 자꾸 뒤를 쳐다본다.
네 명의 아이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약속이나 한 듯 가위, 바위, 보를 소리 없이 한다.
맨 먼저 가서 보고 올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순서대로 가서 보고 오기로 약속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세가 첫 번째다.
그 찰나의 순간,
잠깐 사이 기세의 머릿속에는 엄마가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잘 들을 걸 하고 후회의 마음이 밀려온다.
안도의 숨을 내쉰 나머지 친구들이 둘째, 셋째, 마지막 순서를 결정했다.
들어가기 전 기세는 세 친구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꼭 약속 지키란 듯이 주먹을 쥐어 당부하는 듯 보인다.
그건 아마도 내가 다녀오기 전에 먼저 도망가거나,
그와 비슷한 치사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기세는 연신 한숨만 내뱉는다.
두 명씩 조를 나누어 가자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수위 아저씨에게 들킬까 봐 떠들 수도 없고,
설령 그런 말을 꺼낸다고 해도 아이들이 용기 없다고
놀림당할 생각에 머릿속과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순간 아무리 셜록 홈스라도 이러한 용기는 없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붙이고 있기에는 세명 아이들의 눈매가 더욱 무서웠다.
결국 기세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끼이익’ 잘 안 열리는 문틈 사이로
기세는 고개를 넣어 복도를 확인한다.
시커먼 복도에 어디에서 비치는 빛인지 모르지만 어슴푸레 벽의 윤곽과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벽에 등짝을 바짝 붙이고, 좌우 손은 벽을 더듬으며, 반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속으로는 얼른 보고 나오리라 계속 다짐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이 왜 이리 쿵쾅대는지, 기세는 두 손으로 자꾸 눌러 진정시킨다.
거기에 귀에 들리는 가슴 뛰는 소리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면 충분히 들렸을 거 같이 크게 들린다.
거기에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걱정도 한몫해
춥지도 않은 날씨에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다.
기세의 눈동자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한참을 걸어간 듯하다고 느끼는 순간.
저 멀리 복도 끝 벽에 뿌옇게 액자 같은 모양의 윤곽이 보인다.
순간 어딜 봐야 할지 모르는 눈동자와 딱딱해진 몸이
오도 가도 못하게 두 다리를 한참 붙잡고 있다.
기세의 머릿속은 액자 모양의 윤곽만 보았지만,
상상 속의 떠도는 소문의 실체인 유관순 열사의 모습이 이미 가득이었다.
꽤 오래 서있었다는 생각이 들 즈음
기세는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 자신도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기세는 뒤돌아 뛰어가면 혹시나 하는 등 뒤의 오싹함이 더 무서워서인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뒷걸음질뿐이었다.
뒷걸음질로 도망 온 기세는 문을 밀자,
밖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 덕분(?)에 쉽게 열리지 않는다.
기세의 괴력이 나올만한 상황이다.
있는 힘껏 문을 ‘끼이이이익’하고 밀어붙였다.
문밖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이들은
문이 열리면서 바닥을 긁는 괴이한 소리와
이상한 힘에 밀려 굴러 나동그라진다.
세 아이들은 엎어진 상태에서 위를 쳐다보자,
어둠 속에 나타난 거대하고 시커먼 형상이 기세인지도 모르고, 비명소리도 합창이다.
어두워서인지,
너무 빨라서인지 저 멀리 뛰어 도망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기세 눈엔 금세 보이지 않는다.
기세는 의리 없는 친구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 순간 기세 뒤에서
‘끼이이익 쿵’하고 벼락같은 소리가 난다.(열렸던 문이 저절로 닫히면서 내는 소리)
기세는 어느새 검은 바닥을 한 끝없는 운동장을 내달았다.
전력 질주를 하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운동장이 왜 이리 오늘따라 크게 느껴지는지.
멀리 교문이 보인다.
당연히 교문은 닫혀 있다.
순간 다행히도 쪽문은 항상 열어 둔다는 걸 알고 있는 기세는
쪽문을 열고 걸음 보고 나 살려라 한다.
집 근처에 기세가 헉헉대며 도착했을 무렵
멀리 마을 아카시아 나무 아래 친구들이 멍한 눈을 하고 기세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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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는 등교 시마다 다시 저학년이 되어 그 교실 근처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초상화는 몇 년 전에 없어진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