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동 이야기(22. 여름방학 숙제 이야기)

22. 여름방학 숙제 이야기-

by 홍반장

며칠만 학교에 가면 여름방학이다.

점심 먹고 오후 수업이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누런색 종이에 등사되어 있는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신다.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작성을 해 달라고 해서 가져오라고 하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가정 환경조사를 하는 것 같다.

그 종이에는 적는 것도 꽤 많다.

맨 위에는 학생의 한글이름과 한자이름, 주소, 본적, 본관, 부모님 성함과 최종 학력,

조부모 동거 여부, 형제자매, 경제적 상황(자가, 전세, 월세) 등등이다.

기세가 쓸 수 있는 내용은 나름 적고,

모르는 내용은 부모님에게 물어서 쓸 요량으로 꼼꼼히 읽어 본다.

본관?

본적은 뭔지 알고 있었던 기세는 본관이 뭘까 고민하다가 결국 빈칸으로 둔다.



그런데 이해 안되는 건 맨 아래에 있는 내용이다.

아랫줄에는 자동차 여부, 텔레비전 유무, 전화 유무(백색/청색)와 전화번호,

냉장고 유무도 적는 칸이 있다.

자동차 유무 칸에도 용달차지만 동그라미,

텔레비전 칸에는 자신 있고, 어렵지 않게 동그라미를 쳐 나간다.

전화 유무 옆 괄호에는 백색인지 청색인지 구분되어 있다.

전화기 색깔을 왜 쓰라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그것도 빈칸으로 두었다.


빨리 마치고 나가서 놀고 싶어 하는 기세는

내일 학교 갈 책가방을 미리 싸놓고, 가방 위에 아까 하던 빈칸 그득한 종이를 올려놓는다.

결국 많은 빈칸을 다 채우지 못한 찝찝한 마음은 있었지만 신나게 밖으로 뛰어나간다.

저녁때 식사를 하고 아버지가 차근차근 한글과 한문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학교에 도착한 기세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선생님 말씀을 듣는다.

그 종이에 적혀있는 항목별 순서대로 손을 들라 하시면 선생님이 사람 수를 세시는 거 같다.

대부분의 내용이 지나가자

선생님은 교단 위 칠판에 비상 연락망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 하게 적어 놓으신다.

가장 먼저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하고 손들어 보라고 하신다.

주물공장을 하다 보니 집에 전화기가 있는 기세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많은 아이들 중 손을 든 사람은 3명이 다였다.

선생님은 기세와 나머지 2명의 이름을 칠판 맨 위에 띄엄띄엄 적고,

그 밑에 동네에 가깝게 사는 친구들 이름을 순서대로 적어 내려가신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망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혹시라도 방학 중에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선생님이 맨 앞 3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그 사람들은 바로 밑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하고, 그렇게 이어 이어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라 하신다.

또한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서 다음 친구 그리고 다다음,

다다 다음 친구 집까지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

가끔 비상소집을 하는 경우도 있어 방학 중에 학교에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신다.

그리고 연락망에 있는 친구들끼리도 이번 기회에 각각의 친구 집에 방문해서 어르신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방학숙제도 같이 하고, 우애도 다지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어느 순간에 칠판에는 문어발처럼 기세 이름 밑으로 이름들이 붙어가기 시작했다.


방과 후

기세 이름 밑에 붙어 있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기세 주변에 모였다.

모두 친한 반 친구들이지만 각자의 집을 가볼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같이 가보려는 것이다.

기세는 가 보고 싶은 친구 집이 있었던지 주도해서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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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여름 방학식 날이다.

기세의 오늘 최대 관심사는 방학숙제의 양과 내용이다.

선생님이 나누어 주신 탐구생활이라는 책을 나누어 받고 내용을 떠들어 보니,

나름 재미가 있어 보이고, 빨리 연필을 들고 싶게 만든 거 같아 호기심이 발동한다.

방학숙제는 겉보기에는 탐구생활과 일기가 전부다.

기세는 숙제가 예전처럼 많아 보이지 않아 들떠 있다.

하지만 탐구생활 안에는 과목별로 나름 많은 숙제가 숨어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방학 첫날 아침 일찍 일어난 기세는

탐구생활 책을 펼쳐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간다.

며칠 내에 끝마치고 개학 때까지 죽 놀 요량이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비상 연락망에 있는 친구들과 했던 약속이 떠오른다.

방학을 하고 나서 일주일 뒤에 모여서 각자 탐구생활한 내용을 나누어 보기로 한 약속이다.

문제는 항상 일기였다.

매일 써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쓰기도 싫지만,

가장 신경도 쓰이고 까탈스러운 건 날씨를 적는 칸 때문이다.

하루나 이틀, 어떨 때는 일주일 못 쓸 때도 있어, 한번 밀리면 날씨 적기가 난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긴 여름방학 내내 즐겁고 다양한 이야기가 많으면 좋지만, 똑같은 일의 반복일 경우가 많기에 더더욱 꺼려지는 골치 아픈 숙제 중 하나이다.


기세는 혼자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방학 중에 일기를 놀기 바빠서 못쓰더라도 날씨는 꼭 적어 놓기로.

아니면 밀린 일기를 쓸 때, 웬만하면 날씨에 대한 내용은 안 적는 것으로.


방학인데도 며칠 동안 방바닥에 누어서

열심히 탐구생활의 빈칸을 메워 나간다.

지금 기세의 모습이 예전 뛰어놀기 좋아하는 기세와는 누가 봐도 달라 보였다.

당연히 기세의 생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책안에는 몇 가지 종류의 숙제가 담겨 있는데,

크게는 책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방안에 누워서, 생각을 집중해 써 머리로 해나가는 내용과,

야외활동 또는 과학 관련 숙제들인데 튼튼한(?) 몸으로 해야 하는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기세는 아무리 고민해도 안 풀리는 수수께끼 같은 몇 가지 내용과 야외활동을 빼고는,

어느 정도 다했다는 생각에 비상 연락망 친구들을 소집했다.

고민되는 몇 가지 빈칸을 얼른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생각을 너무 오래 하는 것은 놀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야외활동 같은 것은 자신이 있는 기세지만,

곤충채집 같은 활동은 아이들과 모여서 같이 해 볼 생각인 것이다.


기세의 의도(?)대로 주은이의 집에 몰려갔다.

주은이의 집은 양옥인데 일층은 책방으로 쓰고, 이층은 주은이네 가족이 산다.

주은이 방과 거실에 모여 바닥에 배를 깔고 탐구생활을 꺼내 놓고, 서로 베끼기 열심이다.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해결사 역할을 해주실 매일 책을 읽으시는 주은이 아버지한테 물어보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풀리는 문제가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편하게 필요한 새 책도 꺼내서 볼 생각이다.

그런데 단지 안 풀리는 문제가 채워져서만 아니라,

기세는 왠지 다른 꿍꿍이로 기분이 좋은 거 같다.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친구들 숙제를 받아 적는 동안,

기세는 주은이 방에 누워 분홍색 벽과 천정을 보기도 하고,

주은이가 앉던 책 보기 정말 편한 책상에 앉아보기도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 다음날 기세와 아이들은 마을 뒤 봉화산으로 향한다.

방학숙제인 곤충채집도 할 겸 전쟁놀이도 할 생각으로 산으로 오른다.

기세가 운이 좋은 거 같다.

잘 안 잡히는 장수하늘소를 두 마리나 기세는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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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날 일주일 전이다.

기세는 벌써 고민이 많다.

다행히도 탐구생활은 작전(?)이 조기에 성공하여 다행이었다.

실컷 놀았던 끝나가는 그 길었던 방학만큼이나 빈 일기장은 깨끗하다.

지금 걱정되어 쳐다보는 건

당연히 상당한 양의 깨끗한 일기장을 무슨 내용으로 채울까 하는 걱정과

매 쪽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씨칸의 공란이다.

허겁지겁 날씨칸을 빼놓고, 밀린 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써 내려간 앞의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다시 써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일기의 내용에는 날씨에 관한 내용은 적지 않는다.

잘못 날씨에 관한 내용은 적어 놓았다가

그날의 날씨와 안 맞으면 완전범죄(?)가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 담임 선생님은 일기 검사를 하시되,

내용은 안 보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일기장 매 쪽별로 선생님 도장이 찍혀있는 것으로 봐서 안심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기세는 꼼꼼하게 날씨와 일기를 썼으리라는 믿는 한 명의 친구가 있다.

기세는 솜씨 좋은 공장형들이 만들어준 곤충채집 통을 들고

주은이 집으로 달려간다.

지나간 일기의 날씨 좀 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들고 간 채집 통을 건넨다.

그 채집통에는 기세가 어렵게 잡은 장수하늘소 한 마리가 들어 있다.

주은이는 곤충채집 통을 두 손으로 들고 기세를 보며 웃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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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날이다.

개학을 하면 선생님은 방학숙제 중에

모범적으로 해온 숙제나 제출물은 교실 뒤에 전시를 해 놓으신다.

교실 뒤에 있는 솜씨란에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곤충채집 통과 이름이 걸려 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웃으시며,

기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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