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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조 Oct 02. 2021

프랑스에서 교수되기 1

네 번째 만남 홍소라

홍소라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된 건 한국 영화에 대한 프랑스 논문을 검색하면 서다. 문화원 세대에 관한 소라님의 논문을 보고 벌써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에 이런 부분까지 연구가 되어있구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파리지엔느>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소라님을 염두에 두었지만 막상 연락을 드리기는 힘들었다. 당시 난 막 학사를 졸업한 학생이었고 소라님은 교수님이었다. 심지어 소라님이 강사 시절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 강의를 하신 적도 있으셨다. 용기 내어 소라님께 연락을 드렸고 소라님은 아주 흔쾌히 응해주시며 프로젝트를 응원해주셨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던 학생이 프랑스에서 교수가 된 이야기를 만나보자.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들었는데 백신 맞고 장시간 운전하신 뒤로 한 쪽 다리가 불편하시다면서요. 


네 맞아요.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가난 비용을 치르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파리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기울어진 집에서 소파베드를 사용하며 지내셨다고요. 


네 그랬죠. 


파리에서 박사 과정을 총 몇 년 동안 하신 거예요? 


한국에서 박사를 수료하고 파리에서 다시 박사 과정을 시작한 게 2012년 겨울이었요. 논문을 통과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게 2019년 12월이었으니깐 7년 정도 걸렸네요.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거라 처음부터 예상하셨나요? 


처음에는 5년 만에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2년이 더 걸릴 줄 몰랐죠. 부모님께서 경제적인 부분을 도와주실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웃음).  


처음 불어를 배우신 건 언제인가요? 


정확히는 1997년 말이었어요. 불어를 배운 지 1년이 안 됐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어떻게 처음 불어를 배우게 되셨나요? 


제 원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어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제가 공부를 잘했던 거예요. 지방에서 공부를 잘했었기 때문에 예고를 간다고 하니깐 집에서 난리가 난 거죠. 지금은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90년대는 예고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예고가 안되면 그럼 어디에 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외고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일단 외고에 가면 기숙사에 살 수 있으니깐 부모님과 떨어져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 생각을 했고 또 불어를 전공하면 나중에 부모님이 반대해도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있겠다. 그럼 거기서 메이크업을 공부하면 되겠다 생각을 한 거죠. 


그럼 그때부터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신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외고에 들어간 후로 다한증이 생긴 거예요. 조금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에서 땀이 많이 나는데 이런 손으로 메이크업을 할 수가 없잖아요. 손님의 얼굴을 축축한 손으로 만질 수 없으니깐. 그래서 다시 진로 고민에 빠졌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원어민 선생님이었어요. 프랑스인 원어민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도 저분 같은 일을 하면 재밌겠다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대학도 가장 프랑스어를 잘 마스터할 수 있을 것 같은 한국외대 프랑스어과에 들어갔고요. 근데 또 수능을 말도 안 되게 잘 본 거예요. 그래서 수석으로 입학을 했는데 제가 입학식에는 참석은 안 하고 엠티에만 참여를 했거든요. 입학식에 수석 이름을 불러줬는데 제 이름을 듣고 아니 우리 과에 홍소라라는 사람이 둘이냐고 걔가 그럴 리가 없다 이러면서(웃음).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입학식에는 왜 안 가신 거예요? 


입학식에 학교를 가긴 갔는데 입학식에 참석을 안 한 거고요. 친구들이랑 그때 PC방에 갔는데 제가 드레스를 입고 갔었거든요(웃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러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갈 때 뒤가 끌리잖아요. 그래서 치마 끝을 잡아주기도 하고(웃음). 


당시 사진이 있다면 보고 싶어요(웃음). 


다행히 사진은 없고요(웃음). 아무래도 외대다 보니깐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다들 쟤는 무조건 해외파다. 국내에서 자란 애가 저럴 수가 없다 그랬던 것이 기억나네요. 


저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웃음). 


그때가 2001년이었는데 아직 이효리 패션이 유행하기도 전이었거든요. 당시 패션 코드가 면바지에 되게 품이 넓은 난방이었는데 저는 이미 그때 오프숄더에다가 귀걸이 이만한 거 끼고(웃음). 그때가 기억나네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봤는지. 


앞서가셨네요. 제가 좀 넘겨짚자면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셨을 것 같아요. 


두 개다 어중간했던 거죠. 공부는 줄곧 했는데 엄청 잘하는 건 아니었어요. 외고에 입학할 당시에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경쟁률이 좀 떨어져서 제가 갈 수 있었어요. 노는 것도 저는 열심히 놀고 싶은데(웃음) 공부를 잘하는 편이니깐 친구들이 너는 이렇게까지는 놀지 말고 집에 가라 하고 그랬어요. 놀다 보면 사실 나쁜 일도 겪을 수 있는데 당시에는 어느 정도 서로 지켜주고 이랬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분들을 만나셨었네요


그렇죠 그래서 어찌어찌 해맑게 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생활도 평범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너무 만족했었어요. 제가 원하던 학과에 들어갔고 제가 싫어하는 과목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서 시간표를 어떻게 짰냐면 수업 뒤에 공강을 만들고 또 수업을 듣고 공강을 만들고 그랬던 거예요. 


그렇게 잘 안 하잖아요. 보통 학교에 있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으니깐요(웃음).


맞아요. 보통 그렇게 안 하잖아요. 저는 수업을 듣고 공강에 그 수업을 복습을 하겠다 이런 마음을 먹고(웃음) 그렇게 짠 거예요. 그래서 1학년 1학기 때 실제로 공강마다 도서관에 갔었어요.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취업이 지금처럼 어려워지기 전이라서 제가 공부하는 모습을 본 선배가 1학년이 무슨 공부를 하냐며 타박하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동아리방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연극부 분위기가 어땠냐면 매일 소주를 먹고 있었거든요(웃음). 짜장면을 시키면 짜장면에 소주를 먹고 떡볶이를 사 오면 떡볶이에 소주를 먹고 그것도 없으면 그냥 깡소주를 먹는 분위기였어요. 시험기간에도 소주 먹으면서 노래 부르곤 했는데 저는 그 옆에서 공부를 하고 그랬었죠.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었고 재밌었어요. 


분위기에 휩쓸릴 만도 한데 공부는 계속 열심히 하셨네요. 


그랬었죠. 계속 성적 장학금을 받았으니깐 근데 제가 2학년 1학기 때 연극부 회장을 맡으면서 바빠지면서 수업을 잘 안 들어갔었어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재수강하고 계절 학기 듣느라 되게 힘들었었는데... 2학년 1학기 때 불어 점수를 처음으로 C를 받은 거예요 그전에 항상 A+이나 A를 받다가. 그러니깐 너무 충격적이기도 하고 열이 받는 거예요. 지금은 너무나 친한 교수님인데, 이 교수님이 책에서 시험 문제를 안 내고 수업 중에 했던 이야기를 시험에 낸 거예요. 그래서 다음부터 이 교수님이 하시는 모든 수업에 들어갔어요. 


저 같으면 그 교수님 수업에 다시는 안 들어갈 것 같은데요(웃음).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 후에 그 교수님 수업에서 모두 A+을 받았어요.  지금도 그 교수님이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 그러세요. 


아직도 교류를 하시나요? 


제가 한국에서 박사 과정에 들어갈 때 추천서도 써주시도 했고 여러 가지 지금도 많이 도와주세요. 저희 부모님께서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걸 굉장히 반대하셔서 아예 연을 끊자 이 정도였거든요. 경제적 지원이 일절 없음은 물론 전화도 안 받으실 정도의 상태가 6개월 넘게 지속이 됐었던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이메일을 써주시기도 했어요. 


그래서 설득이 됐었나요? 


그걸로도 풀리시지 않았고 그 상태로 프랑스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1년 가까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풀리게 됐죠. 


그래서 외대를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가지 않으신 건가요? 


외대에 다니던 시절 휴학하고 프랑스 리옹으로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프랑스에 가고 싶은 걸 아셨으니깐 어학연수를 갈래 유학을 갈래 이랬었는데 그때는 당장 가고 싶으니깐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했죠(웃음). 


많은 학생들이 어학연수 도시로 선택하는 리옹 (사진 출처 : https://pokaa.fr)



어학연수 시절은 어떠셨어요? 


한국에서 문법은 많이 익혀갔기 때문에 회화를 늘리는 게 주된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정말 미친 듯이 놀러 다녔어요(웃음). 클럽을 일주일에 3-4일을 가고... 


혼자 가셨어요 아니면 친구분들과? 


처음에는 혼자 다녔고 나중엔 클럽에서 친분을 쌓은 건 아닌데 같이 노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클럽에 혼자 그것도 외국에서 가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그때 제가 만 20, 21살 이때니깐 어렸으니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또 지금은 리옹에 한국인도 많고 동양인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되게 튀었었고 그게 친구를 사귀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도 어학연수를 리옹에서 했거든요. 저는 2017년도에 어학연수를 했는데 한국인도 꽤 많고 동양인도 자주 본다고 생각했는데, 리옹에서 파리로 온 프랑스 친구는 파리에 오니깐 리옹에서는 보지 못했던 동양인들을 자주 본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현지인과 외국인 특히 한국인이 자주 가는 곳은 다르니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또 파리는 워낙 동양인 수가 많고요. 저는 리옹에 살 때 유학원의 농간으로 기요띠에(Guillotiere)에 살았었어요(웃음). 


아...


리옹 슬럼가 기요띠에 (사진 출처 : https://www.lyoncapitale.fr)



기요띠에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랬을 것 같아요. 저는 거기에 맛있는 쌀 국숫집도 있고 아시안 마트도 있어서 이주에 한 번씩 갔는데 갈 때마다 에피소드가 생겼거든요(웃음). 


저는 문제가 뭐였냐면 그토록 꿈꾸던 프랑스에 처음 갔잖아요. 어리기도 했고 프랑스에 가기만 하면 내 인생 일대의 로맨스가 생길 거라 생각하고 갔는데...(웃음). 처음 리옹 생텍쥐페리 공항(Aéroport Lyon Saint-Exupéry)에 내렸을 때만 해도 하늘이 보라색이고 나의 인생은 여기서 피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기요띠에에 도착하고서...


그 유학원이 어딘지 정말 궁금하네요. 


당시가 2003년이었는데 15제곱미터짜리 스튜디오를 한 달에 423유로를 내고 살았었어요.


정말 비싸게 받았네요. 저도 어학연수할 때 유학원에서 연결해준 기숙사에 살았었는데 시설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거든요. 화장실은 공용이었고 방 안에 인덕션, 전자레인지, 냉장고 이렇게 있었는데 가격이 420유로 정도였어요. 크기도 무척 작았고요.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는 건 없었지만 가장 행복했던(웃음).


다음 편에 계속...





인터뷰어 조소희 

파리 8 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후 단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이 홍소라 

현) Université de La Rochelle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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