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만남 홍소라
어떤 사람은 무모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결국엔 그렇게 기회를 얻어낸 거잖아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어요(웃음). 서류도 준비를 안 해갔었고 그래서 그때 교수님이 한 가지 테스트를 하셨어요.
어떤 테스트였나요?
제가 에스페란토(Esperanto)라는 국제보조어를 할 줄 안다고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처음 들어보는 언어 이름이에요.
한때 유행했던 언어예요. 유럽의 모든 언어를 섞어 만든 인공어라 16가지의 간단한 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규칙이 없는 언어인데 잘 알고 계시는 파파고(Papago)가 앵무새라는 뜻을 가진 에스페란토어예요. 저는 이 언어를 학교에서 배웠었거든요. 사실 라틴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수강 신청을 못해서 그럼 뭘 하지 고민하다 에스페란토어가 뭔가 있어 보이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배우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불어랑 비슷한 면이 있으니깐 어렵지 않아서 어떻게 강사 선생님 눈에 들어서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에서 저를 리투아니아까지 보내주고 그랬었어요. 제 지도교수님도 에스페란토를 하시는 분이라 저에게 에스페란토어로 적혀 있는 1930년대 동아일보 사설을 Synthèse 해오라는 미션을 주신 거죠. 그 테스트를 통과하고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면 박사 과정을 하면서 논문 주제가 바뀌신 건가요? 제가 소라님을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관련 논문을 찾아보다가 소라님이 쓰신 문화원 세대와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에 관한 논문을 보게 되면서였거든요.
제가 한 번 꽂히면 그걸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처음에 생각한 일제강점기 시절 프랑스 영화 수용에 대해서 꼭 쓰고 싶었어요. 그걸 쓰기 위해 프랑스에 온 것도 있고 그런데 교수님이 주제를 바꿔보면 어떠냐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니다 나 이거 꼭 할 거다 했는데 교수님이 한 마디로 끝내셨죠. ‘너 일본어 할 줄 알아?’(웃음). 당시 조선에 수입되는 영화는 모두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고 그러니 일본 자료를 독해할 수 있어야 깊이 있는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다시 논문 주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불어를 하는 사람이면 직간접적으로 그 옛날 프랑스 문화원의 영광에 대해서 들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 주제를 가지고 눈문을 써야겠다 생각을 했고 지도 교수님도 괜찮다고 해주셔서 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문화원 세대에 대한 환상을 가진 상태로 연구 대상에 접근을 했었고 논문을 쓰는 과정은 그 환상을 깨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에는 문화원 세대부터 시작해서 1996년 부산 국제 영화제와 함께 발표된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건드리게 됐죠. 논문을 계기로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문화원 세대와 관련해서 한국 영화사 구술 작업 자문도 하게 되었어요. 문화원 세대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대해 서누 구도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린 바가 없는 거예요. 지금 그런 작업이 한참 진행되고 있죠.
저는 학사를 막 졸업한 상태라 논문을 쓴다는 것이 또 불어로 쓴다는 것이 아직 상상이 안 되는데요. 박사 생활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지도 교수의 성향과 전공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렇다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제 케이스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역사학을 전공했는데 저의 경우는 세미나에 갈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논문 쓰기에만 집중을 하면 됐거든요. 근데 저희 지도 교수님께서 학생들이 자꾸 하나 둘 사라지니깐 1, 2년 차에는 교수님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걸 조건으로 거시기 시작하시더라고요(웃음). 그 외에는 저희 지도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정말 내버려 두셨어요. 네가 알아서 쓰고 어느 정도 쓴 글이 있으면 그때 나를 찾아와라 이런 식이었어요. 다른 언어학이나 교수법 박사 과정의 친구들을 보면 교수님을 정말 자주 만나는 경우도 있었고 교수님이랑 같이 연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공대 같은 경우에는 한국의 공대처럼 월급도 받으면서 근무하는 것처럼 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떤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일을 할 때 학생들을 데려가기도 해요. 일을 시키기도 하지만 결국엔 박사 과정생들에게 커리어를 만들어주는 거죠. 그리고 인문 쪽은 박사를 3년 만에 마치라고 하긴 하는데 역사나 사회학 같은 인문 쪽은 3년 안에 끝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에요. 또 저같이 생계를 직접 해결하면서 하는 경우에는 더 힘든 거죠.
박사 과정 중에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Arts et Métiers 쪽 가면 액세서리 재료상이 있잖아요. 거기서 재료를 사서 귀걸이를 만들어서 벼룩시장을 돌면서 팔기도 했는데 제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꿈을 꿨기도 했고 그래서 한글학교에서 일을 시작했죠. 경력에는 도움이 됐지만 생계를 위해서 충분한 돈을 벌지는 못 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시험을 보게 하는 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인턴을 구하는 거예요. 사장님께서 한국이 영어 교육열이 높은 걸 아셔서 한국까지 시장을 넓히시고 싶어 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서 힘들 텐데...
그렇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시험이 아닌 경우에 취급을 하지 않잖아요. 어찌 됐든 저는 일을 해야 하니깐 지원을 했죠.
이번에도 찾아가셨나요?
그때는 메일로 먼저 지원을 했고요. 근데 그때 제가 학생 비자가 아닌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학생비자가 아니니깐 Stage(학생들만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인턴 제도)를 못하는 상태였던 거예요. 근데 정말 저는 그때 제 경력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어필을 했죠. 내 생각에 당신들이 뽑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지원자는 나일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일주일 정도 무료로 일을 해줬어요. 당시 체계도 제대로 안 잡혀 있을 상태라 학교 리스트라든가 그런 기본적인 업무도 안되어 있었는데 제가 일주일 동안 그런 업무를 해서 보내준 뒤에 찾아갔죠.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데 무료로 일해주는 건 여기까지라고. 정식으로 고용을 하던지 아니던지 선택해라 했더니 이제 고용이 된 거죠.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어필까지는 한 번 해볼 수 있는데 일주일 동안 그것도 회사에서 만족할 만큼의 일을 무료로 해주고 담판을 짓는 건 생각하기도 실행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때는 굉장히 간절했으니깐요. 그다음에는 주불 한국 교육원에서 한국어 아틀리에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메일을 보내서 약속을 잡고 찾아갔죠. 원장님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고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원장님이 너의 열정은 알겠지만 우리는 일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미 있는 자리에 너를 쓸 수는 없고 대신 네가 학교를 뚫어오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자면, 학교에서 한국어 아틀리에를 하게 되면 한국 정부에서 강사료와 재료비를 반 내주고 그 학교 측에서도 반을 내는 그런 시스템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새로운 학교를 찾아오면 거기서 진행을 해주시겠다는 거였어요. 근데 또 마침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가 프랑스 전역에 있는 중학교에 영업을 하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Île de France(파리를 포함한 그 주변 일대)에 있는 모든 중학교 교장선생님들에게 제안서를 메일로 보냈어요. 나는 이런 사람이고 한국 정부에서 이런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런 걸 내가 할 수 있다 대신 강사료 반만 내라 이렇게 보냈고 그중 가장 추진력이 좋았던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됐죠.
듣고 보니 정말 자신의 길을 홀로 개척하신 것 같아요. 아틀리에에서 어떤 걸 가르치셨나요?
서예, 종이접기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케이팝 댄스와 판소리도 하기도 했어요.
혼자 다 하신 거예요?
흉내만 낸 거죠(웃음).
그때가 2011년쯤이었나요?
아니요 2013년 2월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슬슬 케이팝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네요.
그렇죠. 그때 파리에서 거리가 좀 있는 학교에서 수업을 했었거든요. 왕복 4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했다가 학생수가 늘게 되면서 반을 하나 더 개설해서 일주일에 두 번 갔었어요.
속초에서 서울 왕복하는 게 보통 4시간 걸리거든요. 일주일에 두 번씩 왕복 두 번이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는 좋아서 힘든 것도 모르고 다녔던 것 같아요. 경력이 조금씩 쌓이게 되었으니까요. 대학 강사 쪽으로도 지원을 많이 해봤는데 항상 하는 말이 경험이 없어서 안된다는 말이었거든요. 그래도 계속 지원을 했었는데 어느 날 파리 8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를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거예요.
바로 저희 학교죠(웃음).
전부터 계속 지원을 했었기 때문에 이력서, 자기소개서가 이미 있는 상태여서 공고를 보자마자 지원을 했어요. 이게 굉장히 신의 한 수가 됐는데,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는데 면접일이 제가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한 다음날이었어요. 그래서 미안한데 나 이때는 한국에 잠시 들어가기로 되어있으니깐 그전에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이야기해서 서류도 제가 제일 먼저 내고 면접도 제가 가장 먼저 보게 된 거죠. 근데 제가 불어도 곧잘 하고 대학 강사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경력도 쌓아놨기 때문에 괜찮아 보였나 봐요. 그래서 바로 그날 합격 소식을 들었죠. 그렇게 프랑스 대학에서 경력이 시작됐어요.
다음 편에 계속...
인터뷰어 조소희
파리 8 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후 단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이 홍소라
현) Université de La Rochelle Associate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