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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조 Oct 03. 2021

프랑스에서 교수되기 2

네 번째 만남 홍소라

맞아요. 지나갈 때 누가 봉쥬르하고 인사하면 나도 웃으면서 받아주고(웃음). 그러면 따라오면서 말을 걸잖아요 그럼 나는 또 잘 못 알아들으니깐 그걸 이해하겠다고 하고 있고. 그때는 냉정하게 됐다고 잘 못했으니깐. 


맞아요. 한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친절 베이스가 남아있으니깐. 


여성으로서의 사회화. 친절하고 예의도 있어야 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남아있으니깐. 웃으면서 친절하게 거절하면 그들은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 하루는 기요띠에 광장 정중앙에서 어떤 남자가 내 손을 듣고 ‘Voilà ma femme! (여기 내 여자 친구야!)’ 이런 적도 있고 하루는 프랑스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해주겠다며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문이 바로 잠기는 문이 아니라 문을 닫고 열쇠로 돌려야지 문이 잠기는 형태였거든요. 짐을 놓고 문을 닫으려니깐 어떤 남자가 방에 들어왔던 적도 있었어요 


정말 큰일이잖아요 어떻게 하셨어요?


그때 제가 패닉 상태에 빠지면 몸을 못 움직이고 말을 못 하는구나라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다행히도 저희 바로 앞집에 한국인 언니가 살았는데 제가 요리를 못 하는 걸 아니깐 언니가 도와주겠다고 했었거든요. 문 소리를 들었는데 제가 안 찾으러 오니깐 문을 열어본 거예요. 근데 웬 남자가 서 있으니깐 언니가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서 얘가 도망가더라고요. 그리고 건물 청소를 하는 아저씨에게 웃으면서 봉주르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 분 후에 제 방문을 두드리고 청소를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 돈 안 냈으니 괜찮다 했는데 네가 웃으면서 봉주르를 했잖아 너의 친절에 대한 값으로 청소를 해주겠다 해서 나는 또 감사하다고 물 한잔을 줬어요. 정말 한국식이었죠. 그 후로 찾아오면서 친한 척하더니 결국 들이대고... 나이가 거의 할아버지뻘이었는데... 


프랑스에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나 또 건물에서 일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인사하는 건 일상이잖아요. 서로 인사만 하고 빠르게 지나치는 경우도 있지만 자주 마주치는 경우에는 스몰 토킹도 하고 그러는 게 일상인데 웃으며 인사했다는 이유로 방까지 찾아오는 건 과연 프랑스인이었어도 그랬을까 싶죠. 


그렇죠. 제 앞집에 살던 그 언니가 네가 웃으면서 다녀서 그렇다 그러지 말라 그러는데 또 저는 억울한 거예요. 이게 내 잘못이냐 그들의 잘못이 아니냐 했더니 그 언니가 어쨌든 이 사회에 있으니깐 네가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냐 앞으로는 땅만 보고 다녀라 해서 그다음부터는 땅만 보고 다녔어요. 


리옹의 Place bellecour. 어학연수 시절 가장 많이 지나가던 곳이다 (사진 출처 : https://actu.fr)



저도 처음에는 웃으면서 다녔어요. 심지어 도착한 다음 날에 지나가다 어떤 남자가 ‘니하오!’ 이러고 갔는데 그때는 아 이게 인종차별이구나 신기하다 이러면서 웃고(웃음). 그리고 점점 웃음을 잃어갔죠. 그때는 더 심했을 것 같아요. 또 파리와 리옹을 비교해봐도 리옹이 앞도적으로 인종차별이 많았거든요. 


그렇죠 아무래도 파리에는 동양인이 많으니깐. 당시 동양인이 많이 없다 보니 좀 주목되는 게 있었어요. 클럽에서 춤을 추고 싶은데 몸을 밀착시키는 남자애들이 너무 싫어서 제가 택한 방법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춘다(웃음). 


정말 클래스가 다른 느낌이에요(웃음). 


테이블 위에 올라가면 시선을 집중될지언정 함부로 다가오지는 못 하니깐. 저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대단했다 싶어요.


그렇게 놀면서도 공부도 열심히 하셨을 것 같아요. 


3개월 동안 델프부터 시작해서 달프를 땄으니 그랬다고 할 수 있죠. 


3개월이면 정말 짧은 시간인데요. 


지금은 치르고 싶은 단계의 시험을 바로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단계를 하나씩 높여갔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델프부터 달프까지 다 땄었죠. 부모님이 돈 들여서 어학연수를 보내줬는데 빈손으로 들어가기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랬었죠. 


달프를 따고 들어오신 다음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한불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불어를 하다 보면 영어가 잘 안 되는 상황도 발생하잖아요.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고생해서 배운 불어 실력이 없어지는 게 싫으니깐 불어를 까먹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1년 정도 통역을 했죠. 


기억나시는 통역 업무가 있으세요? 


콩고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수행통역을 했었고 한국 프랑스 수교 120주년에 프랑스 페스티벌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순차 통역을 맡았었어요. 처음부터 이런 굵직한 통역을 맡은 건 아니고 작은 행사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갔죠. 그래서 통역을 전업으로 할까 하다가 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가지고 있던 꿈을 버리기 싫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은... 


그리고 팟캐스트를 들으셨다고 하셨으니깐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알기 싫다> 팟캐스트를 원래 들으시나요? 


이번에 소라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몇몇 에피소드만 들었습니다. 


그랬군요. 예전에 제가 <나를 알기는 싫었다>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프랑스에서 살고 싶어진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번 했었거든요. 결국 몸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가 한국에서는 뚱뚱한 편이라서 한국에서는 내 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문제는 당시에 제 사이즈가 프랑스식으로 38(한국식으로 95)이었어요. 


정말 표준 사이즈인데... 


그런데 한국 옷 가게 가면 ‘언니 사이즈는 없어요’ 이렇게 말을 하니깐 저는 내 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죠. 근데 프랑스에서 38은 정말 모든 가게에 있잖아요? 


그렇죠. 


그게 너무 행복한 거예요, 내 몸이 속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인가 보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제가 처음으로 제 몸을 사랑하게 됐던 것 같아요. 메이크업이나 옷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 몸에 대해서는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인종차별이나 이런 것들이 있지만 이것만 조금 조심하면 내가 이곳에서 정말 자유롭게 나답게 살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죠. 


그런 걸 생각하면 프랑스 유학을 한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치시고 가셨으니깐 늦게 가신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부모님이 어학연수를 갈래 유학을 갈래 했을 때 어학연수를 갔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더 이상 보내줄 경제적 여유가 없다 이렇게 선을 그으셨어요. 또 유학을 가려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소속이 없는 건 좀 두려웠던 거예요, 그래서 유학을 준비하면서 학교 다니고 일도 하다 보니깐 조금 뒤로 미뤄지게 됐죠. 


어떤 일을 하셨어요? 


통역일도 계속하고 연세대 한국학 협동과정 박사과정에서 한국 문화관광연구원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어요. 원래 계획은 한국 현대사회 문화를 전공하고 프랑스에서 포스트 닥터를 하자 생각을 했는데 제 논문 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프랑스 영화 수용에 대한 연구였거든요. 그래서 1920, 1930년대에 한국에 들어왔던 프랑스 영화들을 보고 싶은데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에 가자라고 생각을 했고 줄기차게 시네마 테크에 다니면서 무성영화를 봤어요. 그러다 보니깐 내가 프랑스에서 교수가 되고 싶은 거라면 네트워크도 중요한데 그럴 거면 프랑스에서 박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또 그때쯤 프랑스 박사 과정에는 한국식 수료라는 개념이 없구나 알게 됐었어요. 그래서 그러면 프랑스에서 박사를 하자 마음을 먹고 지금의 지도 교수님이 수업하는 곳에 찾아가서 나 당신 밑에서 논문을 쓰고 싶다 말을 했죠(웃음). 


이메일로 먼저 연락한 게 아니고요? 


네 정말 무작정 찾아가서 세미나를 듣고 나서 끝나고 말을 걸었죠. 


피케티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EHESS (사진 출처 : https://www.ehess.fr)


EHESS(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 과정을 하셨는데 이 학교가 정말 유명한 학교잖아요. 


네 그런데 제가 이 학교가 유명해서 알게 된 게 아니라 제가 한국에서 전화 통역 봉사를 했었거든요. 그때 한국에 살던 프랑스 친구가 무슨 일이 있어서 한국 경찰서에 갔는데 소통이 안되니깐 BBB코리아라는 2002 월드컵 때 창립한 비영리단체가 있거든요. 누구든 무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는 하는 단체인데 거기에 전화를 했고 거기서 저를 연결시켜준 거예요. 그래서 통역을 하다가 어쩌다 친해지게 됐고 그러면 한 번 만나자 해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이 학교에서 한국학 석사 과정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이 학교를 알게 되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지금처럼 인터넷에 정보가 많지 않았어서 다른 학교를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와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쳤네요.  


그래서 이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얘 뭐지 싶었을 거예요(웃음). 그 상태에서 내 논문 주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프랑스 영화 수용이고 이런 Problématique(문제제기)를 할 거고 내 꿈은 프랑스에서 교수가 되는 거고 나중에 당신의 동료가 될 건데 나를 한 번 키워봐라 이런 거죠(웃음). 



다음 편에 계속...





인터뷰어 조소희 

파리 8 대학 영화과를 졸업한 후 단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이 홍소라 

현) Université de La Rochelle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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