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영어 10
영어에 관심있고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은 언제나 로망이었다. 어릴 적 노란 눈에 금발을 한 사람이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고불고불한 검정머리 사람을 만나면 설레였다. 힐끔힐끔 신기해서 눈길이 갔다. 눈이 마주쳤을 때 Hi 하고 한마디 말 붙여보고, Hi 하고 그쪽에서 대답해 줄 때면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평범하게 자라 특색 없이 커온 여학생에게 이국적임, 색다름은 영어를 공부하게 된 시작점 중 하나였다.
첫 외국생활은 캐나다로 떠난 6개월 간의 어학연수였다. 사실 졸업이 무서워 택한 도피성 연수였다.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웠고, 4학년 1학기가 끝나자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내가 돈 벌어 갈 테니 걱정 마시라고 집에 선포했다. 사실 어학연수를 위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저 휴학하고 졸업을 미루고 싶었다. 다행히 집에서는 어학연수 비용을 대준다고 했다. 넉넉치 않은 형편의 집에 부담을 드리운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그 무거운 마음은 때로는 짐같이 느껴졌다.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서 엄마의 편지를 읽고 펑펑 울면서 갔다. 그동안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두려움과 그림움에 눈물이 났다. 외국에서는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한국에서는 두리뭉실한 집순이였는데, 뭐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방밖을 나갔다. 한국 친구들과도 영어로만 대화했다. 답답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영어로만 대화하는 생활을 해 나가다 보니 영어가 편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첫 외국 생활이고 첫 자취 생활이었다. 나는 여물어갔다. 20살이 넘어 나이상은 성인이었지만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몸만 어른에서 세상살이를 관찰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낯선 환경에서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곳으로 찾아가고 나의 먹을거리, 입을 거리들을 관리해 나가는 과정은 처음이어서 서툴렀지만 한사람 몫을 하는데 드는 품을 알게 해주었다. 세상에 거저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연수기간동안 친했던 친구 한명은 이런 얘길 했었다.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여기 오기도 했지만,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오기도 한거야. “ 어학연수는 어학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연수도 되었던 듯하다. 내 자식도 어학연수 가겠다고 하면 보내주고 싶을 정도로 나에겐 귀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영어교사가 된 후로는 여행도 자주 할 수 있었고, 교육청이 주관한 해외연수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하와이로 1개월, 호주로 5개월 가량의 연수를 다녀왔다. 학생 때 부모 돈을 축내며 간 연수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하와이에서의 연수는 영어를 위한 연수라기 보다는 영어교사를 위한, 영어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 관한 연수였다. 2주간의 기숙사생활과 2주간의 홈스테이 생활을 했다. 기숙사생활이 몸과 마음은 편했지만, 홈스테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얻는 것은 더 많았다. 사람을 더 만나고 알게되는 일은 피곤하지만 값진 일이다. 호주연수는 어학연수의 성격이 보다 강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배운다는 건, 다시 학생신분으로 돌아간다는 건, 회춘하는 기분이었다.
6년간의 교사생활후 남편의 일로 휴직하고 뉴질랜드에서 5년간의 생활을 했다. 그동안의 찔끔찔금 몇 개월의 외국생활과는 다른, 본격적인 외국 생활인으로의 시작이었다. 뉴질랜드에서의 목표는 영어가 아닌 사회적응이었다. 30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다 뉴질랜드에서 직장을 다니는 남편을 둔, 무직에 애없는 주부는 할 일이 너무 없었다. 너무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학교, 직장으로 이어진, 자연스럽게 얻게 된 인간관계들이 새로운 환경에는 없었다. 대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대부분의 수업이 원격으로 이루어져 학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무료한 생활 속 말한마디 할 기회를 찾으러 고군분투했다. 오후 4시가 되면 상점들이 문을 닫고 6시이후엔 어둑해진 길에 나다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 이 속에서 얻게된 작은 인간관계들이 너무 소중했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있게 되니 너무 외로웠다. 일상의 소중함, 일의 소중함이 절절이 느껴졌다. 그동안 힘들다고 징징댔던 일상들이 그리웠다. 2년여간의 외로운 생활 속 첫째가 태어났고, 잠잘 시간도 밥먹을 시간도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생에 왜 중간은 없을까. 다행히 아이를 매개로 새로운 인간관계들이 형성되었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일상들은 때론 재미있고, 때론 스트레스였다. 모국인만큼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나를 움츠러들게했다. 기본적인 생활은 되었지만 영어를 매개로 친구를 사귀는 일은 힘들었다. 한국어로도 힘든 수다가 영어로는 더 힘들었다. 말의 빠르기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배경지식의 부족 때문에 쉽사리 대화에 참여하고 공감하기 어려웠다. 어찌저찌 안면을 트게 된 외국인들은 대부분 인내심이 많은 나이스한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대화하면 더 재미있을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잠깐만 대화해도 쉬이 피곤해졌다. 그래서 한국인 친구들과의 시간이 참 소중했다. 익숙함, 편안함이란 벽을 뚫지 못하고 한국에 왔다. 뉴질랜드에서의 시간은 때로 힘들고 외로웠다. 그 시간을 함께 보내준 사람들이 때로 눈물나게 그립고 그립다. 뉴질랜드의 햇살과 사람들, 여유와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들이 자꾸 생각난다.
낯선 환경에서의 생활은 우리를 발전시킨다. 5년간의 뉴질랜드 생활 후 온 한국 또한 낯설었다. 뭐가뭔지 하나도 모르는 바보가 다시 된 느낌이었다. 어린이집이 있고, 유치원이 따로 있다고 했다. 월드팸, 팩토, 은물 등 한국인인데도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이 가득했다. 아이를 어디에 보내야 하는지, 아이용품은 무엇이 필요한지, 병원은 어디에 가야할 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찌저찌 적응해간다. 이 헉헉대던 순간들을 버텨내고 알아낸 스스로의 궁댕이를 토닥토닥해주고픈 맘이다.
아직도 캐나다에서 처음 묵었다 기숙사 방이 생각난다.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가던 길의 빨간 벽돌 주택과 그 앞의 단풍이 생각난다. 하와이에서 친구들과 깔깔대며 점심 먹으러 버스타러 가던 길, 홈스테이 가족들과 깜깜한 밤 차를 타고 가다 무서워 돌아오던 날들이 생각난다. 브리스번에서 숙소로 돌아오던 그 버스안의 공기가 생각난다. 집 앞 타카푸나 비치 바다가 생각난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느 순간 바다로 첨벙했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난다. 새로운 것을 겁내하고 무서워하지만 타성에 젖어있는 삶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내가는 과정에서의 기쁨을 배웠다. 새로운 일이 닥칠 때 무서워하지 말자 라고 스스로 되뇌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