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이야기
또 한 해가 지났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생각 속을 떠다니는 종이배를 타고 흔들거리면서,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세상을 보는 듯했다.
생각들은 과거에서도 밀려왔고 미래에서도 밀려왔다.
현재는 침묵하고 있었다.
요동치는 종이배 위로는 수시로 비가 내리거나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햇살이 비추어질 때도 있었지만 잠시였고 왠지 낯설어 보였다.
나의 <가보지 못한 길>이 서서히 그 형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이미 옛날부터 거기 있었고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팔짱을 끼고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서 있었다. 팔뚝은 굵고 눈은 길고 가늘었다. 거기에다가 푸른빛이 도는 입술에는 경멸의 미소가 얹혀있었다.
"제기랄"
이제는 밀려오는 생각들이 주인인양 나의 <가보지 못한 길>을 제멋대로 단정 짓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침묵하는 현재를 깨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현재는 밀려올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살아 있을 뿐이다.
<가보지 못한 길>의 주인은 지금 살아있는 바로 나일 것이다.
지난해와 다른 한 해가 될 것이다.
10년 동안 내 손을 떠나 있었던 자동 수동겸용 DSLR 카메라를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시 집어 들었다. 카메라는 현재의 순간만 상대하기 때문이다. 작고 두꺼운 사용설명서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구식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쓸만한 그 카메라를 월급 받던 시절에 미리 사두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그것으로 가장 먼저 마주한 현재의 순간은 저녁노을과 그 노을을 배경으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 아내의 얼굴이었다. 현재의 순간과 마주하니 어쨌든 아내가 웃었다. 그 후로 아내는 모델이 많이 되어 주었고 미소도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날 둘째 딸이 사진 관리 편집 프로그램을 소개만 해주었고 매월 지불되는 사용료는 나의 통장에서 자동이체가 되었다. 하지만 며칠 후 둘째 딸은 사진 색감이 좋은 휴대폰도 필요할 것이라면서 “아빠. 휴대폰은 제가 사드릴게요”했다. 휴대폰 모델은 막내아들이 누나와 상의해서 정했다.
현재의 침묵을 깨었더니 좋은 휴대폰도 생겨났다.
그 휴대폰은 지금껏 내가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아껴 쓰고픈 울림 있는 물건이었다.
막내아들은 그 휴대폰에 액정 보호필름을 먼지 한 점 묻지 않게 온 정성을 다해 붙여주었다.
그리고 온갖 아이콘들을 화면에 배열하고 내가 쓸 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막내아들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자신의 돈이 들지 않는 일에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풍요의 겨울 집만큼은 자신의 돈으로 지불했다.
어느 날 겨울 집에서 외출한 풍요가 목 부분에 피투성이가 된 채 밖으로부터 돌아왔다. 바깥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나는 그때 두꺼운 외투를 입고 마당에 서서 ‘카메라로 뭐 좀 찍을 게 없나?’ 하고 초심자들이 그렇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유난을 떨고 있었다.
풍요의 목에서부터 가슴으로 이어지는 하얀 털이 핏빛의 배경이 되면서 검붉은 색이 더욱 선명하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오전까지만 해도 겨울 집에서 빈둥대던 녀석이 어떻게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저런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풍요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풍요야! 우째된기고?”라고 소리쳤다. 그때 풍요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눈을 통해 자신도 얼마나 황당스러우며 고통스러운지를 말해주고 있음을 누가 내 귀에 대고 이야기하듯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풍요는 자기의 겨울 집이 아니라 바로 마당에 드러누웠다. 겨울날 말라버린 누런색 잔디 위에서 호흡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풍요의 옆구리가 보였다. 머리도 누런색 잔디 위에 힘없이 놓여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를 불렀다. 아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겠으나 바로 뒤돌아서서 풍요의 특별 간식을 가지고 나와서 “풍요야~ 힘내라. 이거라도 먹자”하면서 그것을 풍요에게 내밀었다.
그 간식은 아내가 <츄르>라고 부르는 것으로 비닐 스틱 안에 연어 고기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고양이와 친해질 수 있는, 야생고양이를 냄새만으로도 길들일 수 있다는 간식으로서 안단테네가 아내에게 알려준 것이다. 아내는 그것을 매우 아껴서 가끔 사용했는데 그날 풍요에게 두 개나 먹였던 것이다.
우리 집의 침묵이 또 깨어졌다. 둘째 딸과 막내아들도 부산해졌다.
두 사람은 시간을 내어 먼저 품격 있다고 생각되는 ㅁㅁ동물병원으로 달려갔으나 그곳은 다친 고양이가 직접 와서 진료를 받아야 처방이 된다고 해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풍요를 포획해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ㅇㅇ가축병원이었는데 거기에서는 다행히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다친 곳에 뿌릴 수 있는 약을 주었다.
하지만 신속하게 집에 돌아와서 막상 포장지를 뜯으려고 보니 <고양이에게는 살포하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집 구급대원들은 또다시 시내 여기저기를 찾아다닌 끝에 ㅇㅇ가축병원으로 갔더니 사료에 썩어서 먹일 수 있는 약을 마침내 구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나중에 <고양이에게 살포하지 못하는 약>을 풍요 사료로 바꿔왔다.
나는 풍요에게 사료를 줄 때마다 목에난 상처를 보면 마음도 아팠지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저렇게 큰
상처를 입고 왔는지 그 궁금증은 마음을 더욱 갑갑하게 했다.
과거 장군이 영토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풍요에게 그 영토를 넘보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풍요는 그 깊은 상처를 지니고도 매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눈 주변과 콧잔등에 상처를 입어 오곤 했다. 한동안 왼쪽 눈 주변이 크게 부어서 애꾸눈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볼 때는 반항기가 넘쳐났고, 앉아있는 자세도 뭔가 삐딱한 것이 예전과는 달리 매우 불량해 보였다.
나는 '저 녀석도 사는 게 힘들어서 저렇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풍요야! 니는 매일 싸움만 하고 다니나? 힘내라"하고 풍요 눈을 보면서 웃어 주었다.
목덜미의 상처는 보름 가량 지나서야 많이 아물어진 것 같았다. 여전히 아기 손바닥 크기만큼은 털 한오라기 나지 않았지만 드러난 피부로 보아서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풍요를 직접 만지면서 상처를 관찰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곳을 휴대폰으로 찍은 후 확대해서 보곤 했다.
그때 풍요는 표정이 참으로 피곤해 보였다. 나는 사람이든 고양이이든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피로감은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풍요의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을 보고 “풍요 고생 좀 했네, 이제는 별일 없제?”하고 안도의 마음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물어 가던 상처 위에 다시 피를 묻히고 돌아왔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분명 우리 가족이 알지 못하는 고양이로부터 목덜미의 같은 부위를 공격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놈은 같은 부위를 반복 공격하여 치명상을 줄려고 아주 마음을 독하게 먹은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화를 내면서 “그 새끼를 만나면 내가 몽둥이로 반쯤 때려죽여야겠다!” 라면서 가족들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에게도 내 의지를 이야기했더니 그렇게 하면 동물보호법에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런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정 그렇다면 최소한 돌멩이는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놈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만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막내아들이 퇴근길에 우리 동네 근처에서 누런색 고양이를 보았는데 덩치가 크고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풍요를 괴롭힌 고양이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차에서 내려 왜 돌멩이를 던지지 않았냐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고 막내아들은
“어떻게 돌을 던져요?”하면서 웃어넘겼다. 아내도 그제야 그 누런 놈을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녀석이 노란색도 아니고 누런색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놈이 더 밉게 생각되었다.
나는 여전히 미운 놈은 무엇이든지 다 밉게 보고 있었다.
풍요를 괴롭히는 녀석은 일단 우리 가족 내에서는 <누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소재 파악도 안 되고 만나기도 어려운 여전히 미스터리 한 존재였다.
어느 날 아침.
거실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풍요 겨울 집과 그 겨울 집을 감싸고 있는 방풍시설이 이리저리 흩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 심한 몸싸움이 없고서야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난밤 우리 가족들이 깊은 잠 속에 있을 때 큰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싸움 소리를 가족 중에서는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도 풍요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 겨울은 추웠다.
덧난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겨울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두 번째 추방이다.
나는 “풍요 그 녀석도 참 힘들게 산다”라고 탄식하면서 “그놈은 병신 같은기 두 번이나 쫓겨 다니나? 죽더라도 자기 집에서 죽어야지!” 하면서 아내에게 화를 내었다.
겨울 한파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콧물을 주르르 흘렸던 풍요가 추운 겨울밤을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 앞서면서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누렁이 그 새끼는 왜 남의 집까지 기어 들어와서 그 지랄이고? 만나기만 해 봐라. 때려죽여버릴 끼다!”라고 하면서 나의 못된 근성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아내는 “풍요는 최선을 다한 걸 거예요”하고는 “ 고양이 세계는 그 세계대로 경쟁의 법칙이 있을 거예요”라면서 세상 이치를 조금은 아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아이고. 이 추운데 풍요는 우짜노?” 하면서 걱정을 늘어놓았다.
경쟁은 도처에 널려있고 매일 경쟁 속에서 살아가기는 내가 속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경쟁의 끝에 섰을 때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은 없어야 할 것이다. 경쟁이 도둑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