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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18. 2024

흔한 이야기

 추운 날엔 심장이 멈추는 사람이 많다. 한여름에 술 먹고 길에 누워 자는 사람이 많은 것과 같다. 특히 노인들의 심장이 많이 멈추고, 배가 나온 사람들의 심장도 이따금 멈춘다. 기온이 뚝 떨어지는 새벽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보통 아침에 발견이 된다. 그건 흔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려는 것도 흔한 얘기다.


 신고자는 젊은 베트남 여자였다. 한국 농촌의 나이 든 총각에게 시집온 전형적인 베트남 여자. 여자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살았다. 농촌, 베트남, 여자, 총각, 시부모님. 다섯 단어가 세트로 묶인 것처럼 느껴졌다. TV에서 하도 많이 봐서, 혹은 현수막에 붙은 '처녀와 결혼' 광고가 너무 많아서, 아니면 나이 먹은 한국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사는 동남아 처녀를 내가 너무 많이 만나서 그런 것 같았다. 심정지 출동인데도 긴장이 덜 되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심장이 멈춘 남자를 처음 봤을 땐 죽은 지 오래된 게 아닐까 착각을 했다. 몸 전체에 시퍼런 멍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시반(죽은 사람의 혈액이 밑으로 가라앉으며 몸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피부병이었다. 제세동기로 확인하니 호흡과 맥박은 없으나 심장은 전기 신호를 만들어내는 상태, 즉 PEA였다. 그건 심장이 멈춘 지 아직 오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0에 수렴하는 확률이긴 했지만 소생가능성이 있었다. 심장을 누르는 동안 남자의 어머니가 소리쳤다. "얘야, 정신 차려, 일어나!" 그러면 정신 차리고 일어날 것처럼.


 병원에 남자를 싣고 가는 동안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마 영화처럼 눈을 번쩍 뜨리라 상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심장을 뛰게 만든 건 십중팔구 우리가 사용하는 에피네프린이란 강력한 약물 탓이고, 그건 머리를 깨우고 의식을 되돌리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심장만 두들긴다. 그래서 조금 싸구려 같은 표현으로 '약발'이 떨어지면 심장이 다시 멈추는 건 시간문제다. 일반인들에겐 생소하겠지만 우리에겐 아주 흔한 일이다. 그리고 약발이 떨어진 심장이 멈추면 나는 내가 익히 보아온 흔한 이야기를 마주한다. 이른바 죽음이란 이름의 클리셰.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베트남 처녀가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대껴 아등바등하다가 나이 든 남편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뻔한 비극이다.


 심장이 뛰는 남자를, 아니, 심장만 뛰는 남자를 병원에 인계하고 거기에 어떤 반전을 만들만한 특이한 요소가 없을까 곱씹어 본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하나, 남자가 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곧 알 수 없는 이유로 남편의 죽음을 직감한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신고를 했다는 것. 둘, "얘야, 정신 차려, 일어나!"라고 소리치던 시어머니 옆에서 베트남 여자가 베트남 말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셋, 남편을 실은 구급차 문이 닫힐 때까지 아내가 울면서 쫓아왔다는 것. 넷, 그러므로 흔히 상상하듯 돈만 보고 한 결혼이 아니라 사랑 내지는 거기에 버금가는 어떤 감정이 존재했을 거라는 것.


  반전 없는 흔한 드라마에 수도 없이 속았으면서 나는 또 반전을 꿈꾸고 있다. 베트남 여자와 그녀의 남편이 손을 잡고 소방서에 찾아와 초코파이 한 상자를 감사인사로 두고 가는 상상을 한다. 아니면 알몸이 된 두 사람이 전기장판이 깔린 이불 속에 들어가 감사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귀찮아서 결국 관두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나의 이런 상상 또한 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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