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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20. 2024

소방관 집에 불이 났어요

올해 들어 잘한 일을 꼽아보자면 딱 하나가 떠오른다. 다름 아닌 무쇠주물팬을 구매한 것. "설거지할 때 무거워, 사지 마."라고 말했던 아내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이제 주물팬에 구운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고 뱉는다. 그래봐야 프라이팬 아닌가 하고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나도 이젠 주물팬에 고기를 구워 먹지 않은 세월을 후회하는 중이다.


가스레인지 화구에 주물팬을 올린다. 충분히 가열이 되지 않으면 고기가 눌어붙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손끝에 물을 묻혀 팬 위에 퉁긴다. 파샤샤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이건 아직 팬이 충분히 달궈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조금 더 기다린다. 다시 손끝에 물을 묻혀 퉁긴다. 물방울이 팬 위에 닿자마자 또르르 또르르 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굴러간다. 됐다. 이제 고기를 구울 수 있다.


2센티 두께의 삼겹살을 팬 위에 올린다. 거의 스테이크 두께다. 고기가 주물팬 위에 올라가면 어떤 의심이 생긴다. 처음 이 물건을 쓰는 사람들은 다 비슷할 것이다. 고기가 익으면서 땀을 흘리지도 않고 먹음직스럽게 취이이이이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판이 식었나 싶어 고기를 뒤집으면 그제야 진실이 보인다. 거의 튀겨질 것처럼 익은 고기의 단면, 온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육즙이 밖으로 새지 않고 결과적으로 수분이 증발하며 나는 취이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빠르게 한 면을 익히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반대 면을 익힌 뒤 불을 줄이고, 프라이팬 덮개를 팬 위에 얹어 스테이크 삼겹살이 안쪽까지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가니쉬로 놓은 구운 마늘과 양파까지 더해지니 기가 막힌 냄새에 꼴깍꼴깍 침이 넘어갔다. 삼분여가 지난 뒤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달궈진 팬에서 고기의 기름이 순간적으로 위쪽으로 증발하며 불이 붙었다. 불은 거의 후드에 닿을 지경이었다.

"엄마야!"

"살려줘!"

아이들은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자기들 방으로 도망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빠가 그래도 소방관인데 이 정도도 해결 못할까. 나는 조금 섭섭함을 느끼며 프라이팬 덮개를 닫아버렸다. 불은 순식간에 죽었다. 와이프는 소화기를 찾고 있었다.


다시 방에서 나온 아이들에게 와이프가 한 마디 했다. "너희들끼리 도망가면 어떡해." 그래서 나는 오히려 애들 편을 들었다. "잘했어. 정말 불이 나면 지금처럼 도망가."


말해 뭐 할까. 주물팬에 구운 고기는 정말 맛이 좋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불맛까지 더해지니 여느 가겟집 못지않았다. 도망갔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쉬지 않고 고기에 달려들었다. 거의 1킬로를 구웠는데 20분도 안 되어 고기가 바닥났다. 고기맛은 좋았지만 내가 아무 조치도 못 했다면 소방관 집에 불났다는 기사가 지역 뉴스 한 꼭지를 채웠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자나 깨나 불조심.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은 말이다. 오늘은 그 말에 주석을 하나 붙이고 싶다. 


까불지 말고, 소방관도 불조심





참고: 식용유, 육류의 기름도 기름입니다. 거기에 불이 붙으면 물을 뿌리는 순간 기화하는 물방울과 함께 불이 사방으로 번집니다. 프라이팬 덮개를 사용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아예 넓고 두꺼운 옷으로 덮어버리면 불을 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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