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리 Oct 11. 2022

염원

Writer's block Diary: 12일째

김정하의 <염원>, 한려미술대전 수상작 전시회, 사천미술관


대부분의 예술은 직관적이다. 그림은 보는 순간 잘 그렸는지 아닌지가 바로 판명되고, 춤과 패션 또한 그렇다. 음악은 첫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호불호가 갈린다.

 

문학은 좀, 다르다. 시나 짧은 산문이 아닌 중편, 장편소설로 가면 이 글이 잘 썼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일단 다 읽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설령 마음에 꼭 드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게 진짜 끝까지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려면, 끝까지 읽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긴 영화도 세 시간 안팎으로 끝장낼 수 있지만 소설 한 권은 웬만해서는 사나흘, 길면 일주일 정도는 할애해야 하니까. 후루룩, 사발면처럼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치울 웹소설이 아니라면 말이다.

 

읽다가 에잇, 아직도 한참 남았네. 그만두자! 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서적으로 피하고 싶은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내가 생각하던 분위기가 아니라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작가의 사상이나 세계관 때문에, 배배 꼬인 문장이 배배 꼬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만둔 독서는 얼마나 많았던가.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도 일단은 끝까지 본다고 한다.

 

참으로 투철한 직업 의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꾸역꾸역 맛없는 음식을 삼키는 행위와도 같지 않은가. 나와 같은 유형의 인간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재미나 의미가 없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그래서 미리보기 하다가, 또는 앞부분을 읽다가 포기한 책들이 굉장히 많다. 고전 명작이거나 유명인이 추천했어도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그림을 볼 때도 마찬가지여서, 좋은 그림 앞에서는 계속 서 있을 수 있지만 못 그린 그림은 그 앞에서 눈을 두 번 깜박이는 것도 아깝다. (음악은 약간 예외가 있는데, 왜 좋은지 몰랐던 멜로디를 한참 후 다른 장소, 다른 정서에서 들었을 때 감동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혐오의 반대편에는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두고 두고 본다. 몇 번이고 다시 본다. 그 작품이 갖고 싶어서. 그 작품 속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어서. 그럴 리는 없지만 종이를 뚫고 그 미칠 듯한 문체가 내게 전염이나 되었으면 해서. 필사는 손글씨가 엉망이라 그냥 몇 번 해본 수준이지만 타이핑을 하여 갈무리하는 건 그보다 자주 한다.

 

사람들이 왜 특정한 작품을 두고 호好와 불호不好를 느끼는지, 이유를 따져묻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 모든 이유들이 바로 그만의 취향을 구성하고 아이덴티티를 구성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슷해보여도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른 이유로 우리들에게는 자신만의 애정하는 작가가 있고, 각별한 작품이 있고,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대사와 문장이 가슴 속에 있다.

 

내 방 책장 세 번째 칸에도 스무 권의 소설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데, 만일 지금 당장 지구가 멸망하고 나만 혼자 살아남는다면 이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읽고 순서가 끝나면 또다시 차례대로 읽으며 여생을 보낼 자신이 있다. 그런 작품만을 남기고서 모조리 팔거나 버리기까지 하는 결벽 덕분에 완성된 나만의 컬렉션이다. (컬렉션은 다음과 같다: 개선문(범우사), 상실의 시대(문학사상사), 셰익스피어 4대 비극(범우사),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일신서적출판사), 벽오금학도, 속죄, 벨 자, 호밀밭의 파수꾼(현암사), 무기여 잘 있거라(시공사), 마틴과 존, 단 한 번의 시선, 향수, 파인즈, 하이 피델리티, 브로크백 마운틴, 들개,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롤리타(문학동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실,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후 내 작품에 가차없는 혐오를 느낄 독자를 상상하며 몸서리를 친 적이 많다.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남은 부수를 모조리 사서 정월대보름에 달집 태우듯 활활 불태우기를 소원할 정도로. 실패작의 뼈아픔에 대해서라면, 노라 애프런Nora Ephron도 에세이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인생도 계속된다. 차기작을 만들 수 있는 행운을 잡는다. 그래도 실패작은 거기 남아 있다. 지난 삶의 역사 속에, 난폭하고 강력한 힘을 빨아들이는 자기장을 거느린 블랙홀처럼. 한편으로 실패의 장점을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한 성공에 대해, 실패의 힘에 대해 책을 쓴다. 그들은 실패가 성장의 경험이었고, 실패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길 바란다. 내가 보기에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른 실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염원한다. 하나쯤은 남길 수 있기를. 많이 망하면 힘들겠지만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다면 망할 때 망하더라도 젠장, 한 번쯤은 그럴 수 있기를. 소도시의 어느 미술관, 타지인의 눈길을 한 번쯤 사로잡을 수 있는 그림 한 점과 같은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기를.

 

그러려면 일단 오늘도 늦지 않게 잠들고 내일을 기다려야겠다.

이전 11화 에세이라는 장르, 이야기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