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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10. 2022

에세이라는 장르, 이야기의 시작

Writer's block Diary: 11일째

Educated


에세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소설의 초기 형태라고 부르고 싶다.


심리학에 따르면 궁지에 처했을 때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방어기제가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웃거나 농담을 하는 게 방어기제인데, 가령 상갓집에 가서 웃거나 불이 났는데 농담을 하는 식이라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정색하면서 뭘 실실 쪼개냐고 묻는 상대방 앞에서 적당한 대답을 찾느라 앞이 캄캄해진 때도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완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그렇게 튀어나오는 방어기제를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럴까 추리해본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으로써 마치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없거나, 가짜가 되어버린' 것처럼 구는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라는 건 타라 웨스트오버의 자서전 <Educated(한국판 제목: 배움의 발견)>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타라 역시 나와 같은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우연히 만나 여름의 끝물에 읽기 시작한 이 에세이는 <와일드>, <인투 더 와일드(에세이가 아닌 르포에 가깝지만)>와 더불어서 나만의 에세이 베스트 3부작에 등극하였다. 어떤 내용인지는 출판사의 책 소개 한 대목을 빌어보자.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 미국 아이다호에서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는 모르몬교 근본주의자였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 때문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타라는 아버지 말에 따라 복숭아 병조림을 만들고, 밤에는 산으 피신하는 도로 꾸린 가방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산파이자 동종 요법 치유사인 어머니를 도와 약초를 끓이며 여름을 보냈고, 겨울에는 아버지의 폐철 처리장에서 폐철을 모으고 자르는 일을 했다. (중략) 심지어 현대 의학을 믿지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를 만나 본 적도 없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 심각한 뇌진탕, 심지어 폭발로 인한 화상도 모두 엄마가 만든 약초를 써서 집에서 치료했다.'


이후 타라가 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유일한 세계였던 가정을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그녀의 발견은 시작된다.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하고, 선생님과 대립하면서 타라는 점차 자신을 가두고 있던 정신적 울타리를 벗어난다. 타라의 인생은 학교 '이전'과 학교 '이후'로 나뉘어진 셈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마치 소설 전개방식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돌아올 수 없는 강"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은 특정한 문턱을 들어서면 두 번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며, 일생일대의 격돌을 맞을 때까지 작가의 인도에 따라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건 지건 결판이 나면 나름대로의 을 얻는다.

 

나에게도 고립된 시골에서 보낸 17년이 있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논두렁 사이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고, 읍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그 세계의 바깥은 모두 소문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타라의 삶만큼 고단하였던가? 삶과 삶은 정확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고유한 것이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똑같은 갈등을 안겨주되 다른 식으로 변주하는 어린 신의 장난과도 같이, 우리의 정서적 지형이 유사하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내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와 타라의 이유는 정확하게 일치했으니까.


'「너는 타르가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큼이나 느리지만, 아무것도 깨뜨리지 않고 일을 해내긴 해.」 아버지는 수십 번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일할 수가 없었다. 거기로 돌아가면 후퇴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만 해도 나는 집에 돌아오자, 예전에 쓰던 방에서, 예전 삶으로 돌아왔지 않은가. 아버지 밑에서 다시 일하게 돼서 매일 아침 일어나 앞코에 쇠가 대어진 부츠를 신고 폐철 처리장으로 터벅거리고 걸어 나가기 시작하면 지난 4개월의 시간은 없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한 번도 집을 떠나지 않은 때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타라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거창한 기대는 아예 품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처를 기록하는 일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의 경로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보임으로써 자신과 유사한 상태에 처한 이들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리라.

 

그럼 뭐였을까?


하지 않고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예감했기 때문에, 현재의 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남겼을 것이다. 가장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을, 대낮의 광장에 맨살을 드러내듯이 드러낼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상처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상처는 회복할 준비를 시작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잘 쓰여진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과정이다.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사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독자인 우리가 함께 되짚어 나가며, 삶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만 간신히 멋있어질 수 있는지 암묵적으로 깨닫게 되니까.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실제의 삶에 대해서 당사자가 풀어낸 이야기가 이야기로서의 힘을 지닌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 뿐일까. 실화로서의 이야기만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있다 단언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가로젓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실화와 수필, 에세이와 경험담의 강을 건너 이야기의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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