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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17. 2021

잘하는 게임은 정해져 있다

어쩌다 보니 게임에 구원받았습니다 (7) 에이펙스 레전드

적성.


국어사전에 따르면 적성이란 ‘어떤 일에 알맞은 성질’을 뜻한다. 적성은 주로 직업에 관련해서 문제가 되곤 한다. 애석하게도,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는 사람을 만나기란 꽤 어렵지만 말이다.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게임에도 엄연히 적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사람마다 잘하는 게임과 못하는 게임이 처음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의 진위를 검증하고 싶다면 지금 즉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게임들을 가급적 다른 종류로 10개를 선정한 다음, 똑같은 시간 동안 차례로 플레이해보기 바란다.


분명히 처음 해봤는데도 남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실력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덕분에 이상하게 마음에 착 달라붙는 게임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바로 그 게임이 당신의 적성이다.


배틀 그라운드를 떠나 홀씨처럼 떠돌던 내가 마침내 내려앉은 곳은, 세상의 끝(World's Edge)이었다.


지명치고는 공교로운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의 끝은 근미래의 어느 가상의 행성에 존재하는 곳이다. 챔피언 팀이 되어 상금을 얻기 위해서 전 우주에서 몰려든 종족들의 전쟁 놀이터, 공식 운동 경기장이랄까. 일반인들이 상시 거주하기에는 기후도, 지반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게임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만 세상의 끝에 내려앉을 자격이 주어진다.


배틀 그라운드가 대성공한 이후 수많은 배틀 로열(Battle Royal) 방식의 FPS게임이 쏟아져 나왔고 2019년 일렉트로닉 아츠(EA)가 출시한 <에이펙스 레전드(Apex Legends)>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최소 20개의 팀이 기본 3명씩, 적게는 1명씩 팀을 이루어 최종 1팀이 승리를 거두는 방식의 네트워크 FPS 게임으로서, 사실상 뼈대는 배틀 그라운드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디테일이 차이를 만드는 법. 에이펙스에는 배틀 그라운드에 없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이 용케 내 적성에 맞았다.


배그는 음성 채팅이 필수적이다. 팀원을 따로 구해야만 하는 것도 어쩔 때는 부담이다. 한 번 죽으면 완전히 죽어버리는 것도 재미를 떨어뜨린다.


에이펙스는 핑 시스템을 통해서 마우스로 선택하는 것만으로 내장된 대화문이 나가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각 나라의 언어로 대화문이 나가기 때문에 팀원이 한국인일 필요도 없다. 랜덤으로 매칭되기 때문에 별도로 팀원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부활 비컨을 이용해서 이론 상으로는 몇 번이고 되살아날 수 있으므로 재미는 배가된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거다.


배그에서는 옷과 장신구 외에는 병사에게 이렇다 할 특징이 주어지지 않는다. 정직하게 총쏘기 실력으로만 대결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에이펙스에서는 전투 직전에 각 플레이어가 ‘레전드’라고 불리는 게임 캐릭터를 픽해야 한다.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총쏘기 외에 지니고 있는 특기가 다른데, 이 잔재주가 바로 게임의 승패를 뒤바꿀 수 있다.


승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과 맞는 캐릭터를 픽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묘하게 다른 캐릭터의 움직임과 말투, 캐릭터별 기본기와 궁극기가 그것을 조종하는 내 손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곧 죽어도 무채색 옷만 고집하는 조용조용한 사람이라면, 정통 록커 캐릭터 퓨즈(Fuse)를 픽하진 않을 것이다. 캐릭터가 수시로 내뱉는 거친 말투에 거부감을 느낄 테니까. 조용조용한 사람에겐 음험해 보이지만 의외로 의리파인 블러드하운드(Bloodhound), 또는 과묵한 실력자 레이스(Wraith)가 잘 어울린다. 반면에 좀이 쑤셔서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스타일은 옥테인(Octane)이나 패스파인더(Pathfinder)를 선택할 것이다. 점프력을 열 배쯤 증폭시켜 주는 점프 패드, 갈고리가 닿기만 하면 그 반동으로 자유롭게 뛰어오를 수 있는 짚라인 스킬은 타 캐릭터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기동성을 선사하니까.


그렇지만 팀플레이 게임에서는 팀워크가 핵심인 법.


나 혼자서 캐릭터를 잘 고른다고 해서 게임이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팀원들이 어떤 레전드를 픽하냐의 문제,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팀을 이룬 레전드끼리의 케미도 만만찮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서로의 기술이 겹치지 않는 캐릭터를 고르는 게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된다.


뭐, 최고의 캐릭터 조합에, 무기와 방어구가 풀 셋트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안 맞으면 그 팀은 끝이지만.


배그를 할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생존에 급급하느라 팀워크의 진정한 뜻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이펙스에서 잔재주로 살아남으며 승률이 점점 올라가고, 게임을 즐길 여유를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팀워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연히 읽은, 아프리카 대륙에 관한 책에서 나는 이런 대목을 발견한 적이 있다. 책에 따르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용감한 사냥꾼을 존경하도록 부추긴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냥에 대해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사냥에 정식으로 참여했을 때부터라고 한다. 사냥은 언어로 가르칠 수 없고, 사냥 도중에도 언어는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긴박하고 은밀하게 사냥감을 추적하는 상황에서는 몸짓만으로 소통해야 한다. 에이펙스를 하면서 내가 느낀 바가 정확히 그것이었다.


말은 거들 뿐이라는 것. 척하면 척, 딱하면 딱. 군더더기 없는 집단 행동이야말로 사냥의 맛이라는 것.


상대가 벽 위로 점프하고 싶어 할 때, 기꺼이 내가 가진 수직 상승 스킬을 발동시켜 주는 것이 팀워크다. 4칸짜리 빈 실드를 한 번에 채우는 실드 배터리가 없어서 비굴하게 1칸씩 셀을 빨아먹고 있으면, 앞에다 남는 배터리 하나를 슬쩍 떨궈주는 것이 팀워크다. 이동할 때 서로의 속도를 맞춰주면서, 빠른 사람은 앞에서 기다리며 망을 봐주고, 뒤에 가는 사람은 서두르되 뒷각이 잡힌다 싶으면 트랩이라도 하나 세우고 빠지는 것이 바로 팀워크다.


설령 상대방이 나의 좋은 점만 취하고 자신의 이점을 공유하지 않는 얍삽이라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팀워크라는 기름을 쳐줘야만 게임이 잘 굴러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냉혹한 배틀 로열의 세계에서 결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에이펙스 초기 시절, 내가 열중한 레전드는 방갈로르(Bangalore)였다.


입문자용으로 널리 사랑받는 캐릭터, 방갈로르는 뼛속까지 군인인 흑인 여성이다. 방갈로르와 나는 죽이 어느 정도 잘 맞는 편이었으므로 꽤 오랫동안 고정적으로 그녀를 픽했다.


낙하 직후에 무기를 들지 못했을 때 총알 세례를 피해서 연막탄을 발사하는 부특기도 좋았고, 고지대에서 아래쪽을 향해 잠행 탄막을 때려 붓고 적의 실드가 깨지는 소리를 감상하는 주특기도 괜찮았다. “상남자는 조준경을 안 쓴다고? 그럼 난 집중 포격을 사용하지.” 따위의 대사나, 남자 흉내를 너무 내는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거슬렸지만.


가끔 선수를 빼앗겨 방갈로르를 픽할 수 없을 때는 라이프라인(Lifeline)을 골랐다. 이름에 걸맞은 정통 힐캐인 라이프라인은 게임의 고인 물들이 더 잘 이용하긴 한다. 라라는 팀원을 회생시킬 때 다른 캐릭터와 달리 대기시간이 없고, 체력용 드론을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남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독방귀 아저씨로 소문난 코스틱(Caustic)을 픽하게 됐을까?


아마도 방갈로르도, 라이프라인도 픽하지 못했을 때 써보니 의외로 찰떡이어서였던 것 같다.


코스틱은 탱커 라인답게 집채만 한 몸집의 소유자다. 실제 사람으로 치면 못해도 190센티미터의 키에 90킬로그램 정도의 설정은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망각하고 있다가 뛸 때가 되면 비로소 코스틱의 몸집을 상기하게 된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움직이니까. 둔하다면 둔하게 느껴지는 그 느낌 탓에 코스틱을, 그리고 비슷한 덩치의 지브롤터를 픽하지 않는 플레이어도 많을 것이다. 실제 속도의 차이는 없다지만 몸집이 작은 편에 속하는 옥테인이나 레이스는 무척이나 기민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58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여성인 내게 코스틱의 몸집은 오히려 챠밍 포인트였다. 게임이 아니라면 언제 그런 거인이 되어보겠는가? 게다가 코스틱은 지능캐라서, 속도가 느린 게 아니라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굉장하군. 자발적인 실험체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확실한 죽음에 대비해!”
“죽음이 턱 밑까지 왔었다. 이런 기분은 괜찮군.”


미친 과학자라는 설정답게 괴랄한 대사를 내뱉기는 해도 코스틱은 겉바속촉한 캐릭터다. 또 다른 레전드이자 유일한 한국인 캐릭터, 크립토(Crypto)와의 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악랄함이 단지 악랄함에만 그치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코스틱은 위기에 몰릴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스타일이다. 독가스 항아리를 최대 여섯 개 만들어낼 수 있는 기본기 덕분에 무기가 거지 같거나, 탄약이 딸려도 적들은 함부로 코스틱의 은신처에 쳐들어 올 수 없다.


혹여 날뛰다가 항아리가 터지기라도 하면 초록색 독가스는 5, 6, 7, 8 대미지를 지속적으로 적에게 입힌다. 궁극기인 가스 폭탄은 또 어떤가? 수류탄이자 연막탄의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가스 폭탄은 난전으로 정신이 없는 적들을 교란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방갈로르와 라이프라인으로 고작 0.20을 넘겼던 나의 K/D는 코스틱에 정착하면서 0.47로 치솟았고, 현재의 시즌10에 이르러서는 0.64를 찍었다. 두 판 중 한 판은 무조건 한 명 이상을 처치한다는 뜻이다.


“누나는 게임을 왜 해? 킬데가 그래도 0.5는 돼야 게임을 할 맛이 날 것 아니야. 재미가 있기는 해?”


언젠가 그 녀석이 던졌던 물음에, 나는 뒤늦게나마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적성에 맞는 게임을 찾았다고. 배그는 유도 아니었다고, 게임의 참맛을 아는 플레이어로 거듭났다고. 이제는 재미를 느끼지 않을래야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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