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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23. 2021

인생은 오징어 게임인가?

어쩌다 보니 게임에 구원받았습니다 (8) 오징어 게임

경마장에 간 적이 있다.


2021년 넷플릭스가 방영하고 있는 <오징어 게임>의 등장인물, 456번과 같은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이십 대 초반, 당시 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시인 이원이 운영하는 시 쓰기 강좌를 수강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은 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선함과 독특함으로 가득한데 그녀가 내준 매번의 숙제 또한 그랬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시로 쓰기’? 나는 평소 눈여겨봐둔 경마장에 들러, 푼돈을 걸어볼 작정이었다.


경마장은 동대문도서관 근처에 있었다. 책을 빌리러 지나다니다 보면 그곳은 마치 잡지의 다른 면에서 오려내 일부러 거기 갖다 붙인 콜라주 건물처럼 보였다. 바닥엔 뜻 모를 종이조각들이 그득하고, 사람들은 고슴도치처럼 서로 거리를 두며 눈치를 살폈다. 근처의 행인들이 깜짝 놀라서 돌아볼 만큼 맥락 없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고속버스 대합실 같은 느낌이 훅 끼쳤다. 지금부터 상상도 못 할 어딘가로 당신들을 데려갈 예정이라고, 공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과천에서처럼 경주를 직접 보는 게 아니라 모니터를 통해서 경기가 생중계되었다. 하지만 돈을 걸고,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데 있어서는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먼 데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까, 슬리퍼 끌고 와서 어차피 없는 재산 여기다 갖다 버리란 의도겠지.


평일 낮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숫자에 골몰해있었는데 거의 아저씨들이었다. 또래는 없었고, 여자는 창구 안에만 있을 뿐이었다. 현실이 아닌 지점에 뜨문뜨문 서 있는 꾼들의 발밑은 지면과 몇 센티미터쯤은 떨어져 있는 듯했다.


주택복권에 미쳐서 수년간 사진첩에 탈락한 복권들을 고이 모은 덕분에, 복권 개근상까지 받은 내 아버지의 얼굴이 저 틈에 섞여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저들이 어느 동에 사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 공통점만은 확실했다.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투명한 이글거림. 그것을 광기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튼 나는 게임의 규칙을 몰랐기에 창구로 갔다.


“저어...”


“이런 덴 오는 게 아닙니다. 가세요.”



직원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손대지 않고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일도 세상엔 있다는 듯이. 이런 데 와서 버젓이 게임을 하고 있는 저들이 내 미래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막장, 밑바닥, 하류인생, 구제불능, 노답 따위의 낙인이 찍힌 저들에게 오, 미래란 정말 없는가.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오징어 게임>은 막다른 길에 내몰린 인생들에게 미래가 있다고 속삭인다.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화려한 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거액의 상금을 내보인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겠으니 자발적인 참여를 해달라고 당당히 호소한다. 


믿음. 사람들 사이에 겨자씨만 한 믿음만 생기면 그 뒤부터는 설계자들의 뜻대로 일은 굴러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말도 안 되지만 한편으로 말이 될 것 같기도 한 일련의 게임들이 시작된다.


오징어 게임은 참여자가 매 라운드를 지나며 탈락하지 않고 생존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서 최종 승자에게 상금을 몰아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경마나 복권하고도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라운드는 주로 지금의 4,50대들이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친숙한 게임이라서 얼핏 누워서 떡먹기로 보이지만 총을 든 관리자들이 살벌하게 경기를 감시하며, 결과에 대해서는 즉결 심판으로 응답하기 때문에 공포감은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해지거나 통과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수록 유튜버 침착맨의 말마따나 ‘조금이라도 침착한 놈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은 침착해야 한다. 나아가 단지 살아남는 것 이상을 원하는 자들은, 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승자가 되려고 발버둥 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세계의 넷플릭스 시청자들은 공감하며 열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발버둥이라는 건 늘상 치고 있는 것이니까.


인생은 게임일까?


사람이 되어 나고 자라는 동안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잠들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또 꿈을 꾼다. 사람들마다 개별적인 꿈은 다를지 몰라도 궁극적인 꿈은 공통적으로 이게 아닐까.


더 잘 먹고 잘 살려는 꿈,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꿈,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은 꿈.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 꿈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인생은 게임이다.


인생의 하고많은 행위들은, 알고 보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진행하는 하위 게임들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학교 갈 나이가 되어 학교에 가는 것은 게임이다. 최대한 문제 없이 졸업하면 게임의 승자가 된다. 인생의 게임치고는 아주 쉬운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당신이 성인이 되면 아주 부자가 아닌 한 돈벌이를 하는 게임을 시작하게 될 텐데, 무슨 회사든, 어떤 사업이든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벌거나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를 얻기란 미치도록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한 방은 없고, 꾸준히 매일 무언가를 해내야만 겨우 현상 유지를 하거나 1mm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당신은 애인이 생겨 연애를 하는 게임도 할 텐데, 어릴 적의 풋사랑과는 달리 어른의 연애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룰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려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애는 1:1로 진행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이를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인생의 게임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열리지 않는다. 저글링을 하듯 이 게임을 하면서도 저 게임을 놓치면 안 되는데, 한창 이 게임을 붙들고 있는 와중에 다른 게임에서 탈락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믿음에 의문이 생긴다. 이 게임은 공정한가? 보상이 적절한가? 어떻게 게임을 해야 하나. 사람들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믿는다면 누굴 믿어야 하나. 언제쯤 이 고단한 게임의 승자가 결정되고, 언제쯤이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되는가? 죽음 외에 휴식의 길이란 정말 없는 것인가?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비록 게임과 매우 닮아있지만, 실제로도 게임에 비유함으로써 해결되는 부분들도 많지만, 역시나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으니까. 관중도 없고 설계자도 없으니까.


우리는 그냥 태어난 김에 살아보는 것이고, 단지 실용적인 것들만 만들어 생존에만 몰두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할 뿐. 그래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서로들 어울리고 싶을 뿐, 그러니 인생이 어떻게 게임이겠는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후반이 될 때까지, 나는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다. 시인만 될 수 있다면, 등단하여 시집을 내고 활동할 수만 있다면. 위대한 작품을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형편없는 삶을 살다가 홀로 산화해도 예술가로서는 여한이 없으리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스스로가 관리자이자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 규칙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시인이 되면 승자가 되고, 되지 못하면 패자가 되는 규칙. 시인이 먼저 된 친구들은 모두 강을 건너가고, 이편에 남은 나는 영원한 고아가 되는 규칙.


쓰는 시마다 번번이 과잉 아니면 과소가 되었던 까닭은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비뚤어진 마음이었다. 인생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서 망하면 내 아버지, 내 어머니처럼 살게 될까봐 늘 두려웠다.


아, 본심은 이거였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동시에 되고 싶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을 마구 쏟아내더라도, 형편없는 삶을 살다가 홀로 산화하면 그게 무슨 놈의 인생이란 말인가?


게임이고 나발이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내 안의 진지병 걸린 시인 지망생을 죽이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애의 시신을 추슬러 양지바른 곳에다 묻었다.


묘비 앞에 서서 대중성과 재미라는 개념을, 사람들 사이의 다정과 친절을 우습게만 여기던 마음을 바꾸어 살아보기로 했다. 고급 취향을 뽐내며 내 취향만 베스트라고 우기는 정신적 귀족 놀이를 그만두기로 했다. 삶에 뛰어들어 진짜로 의미 있게 굴어보기로, 외면해온 감정들을 제대로 바라보기로 작정했다.


어쩌면 이후의 내가 수많은 게임을 만나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심취하게 된 건, 인과관계에 딱 들어맞는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게임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결론에 거의 도달하게 되었다.


인생은 게임이되 게임이 아니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면서 가장 먼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해맑게 걸음을 옮기던 등장인물, 그와 같이 진지하되 경쾌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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