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리 Sep 30. 2022

가족이라는 이름의 저택을 탐험하기

어쩌다 보니 게임에 구원받았습니다 (9) 이디스 핀치의 유산

@What Remains of Edith Finch


할인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게임을 구매하고, 구매한 게임을 쌓아만 두는 건 비단 나만 저지르는 짓은 아닐 것이다.


이디스 핀치의 유산(원제: What Remains of Edith Finch)이라는 게임 역시 그렇게 수 년 째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게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게임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시간이 없어서, 또는 사놓고 후회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한 호러 탐색 게임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하나씩 오픈해나가는 형태의 게임임을 알고부터, 더럭 겁이 났기 때문에 차마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아둔 시계 태엽이 어느 순간 탁! 하고 풀리듯, 우리는 때가 오면 홀린 듯이 미뤄두었던 숙제를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렇게 한가로운 어느 토요일 오전, 나는 이디스 핀치가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임은 어차피 게임, 이야기가 깊어봤자 얼마나 깊겠어,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가는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주 오랜만의 귀향이다. 처음 보는 것 같으면서도 낯익은 풍경을 따라서 걷다보면 어느샌가 다다르게 되는 건 나고자란 고장이다. 그런때면 어김없이, 아주 어린 날의 내가 어느새 빙의되어 현재의 내가 뒤흔들린다. 그리고 플레이한 지 이십 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변기를 붙들고 구토했다.


게임 멀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디스의 큰 고모할머니인 몰리 핀치(Molly Finch)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통해 스스로 독수리가 되고, 상어가 되고, 마침내 뱀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에까지 다다르자, 치미는 역겨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게임이라는 매체 때문에, 감정이입을 요구하는 어드벤처 게임의 특성 때문에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의 가족사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게임에서 그것과 딱 맞닥뜨리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게임이었으나 게임 그 이상이었고, 이야기가 깊어도 너무 깊었다.


처음으로 내가 집으로 돌아갔던 건 열 아홉 살 되던 해의 어느 명절이었다.


오로지 독립한 어른이 되는 것만이 삶의 이유였으므로 나는 의기양양하게 귀향했었다. 양 손 가득히 첫 월급을 받아 샀던 선물 셋트를 들고, 가족들의 칭찬을 다소곳이 기다렸다. 다음 해에도, 다음 다음 해에도 그랬다. 발길을 끊은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들의 기대에 부응한만큼 기대가 낮춰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대가 높아진다는 걸, 그리고 그런 기대는 영원히 끝도 없이 높아진다는 걸 깨달은 시점 쯤에 포기를 결심했다. 그들이 기다리는 내가 아니라, 그저 내가 행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그에 따른 의무임을 깨달은 그 시점에.


가장 돈독해야 할 가족 관계가, 또는 연인 관계가 끔찍한 파국에 놓여있는데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다른 가족, 다른 연인과 비교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그토록 친밀하기에 의심할 수 없고, 아무리 이상해도 일단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이상을 상상할 수는 없기에, 그 이상함을 일단은 기준할 수 밖에는 없기에 우리는 덫에 치인 짐승처럼 버둥거렸던 게 아니었을까?


토하기까지 했지만 나머지 이디스 핀치의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다. 몇 주를 고심하다 결국은 직접 플레이하는 게 아닌, 게임 전체를 플레이한 Playthrough 영상을 보는 것으로 갈음했다.


게임 속 시간은 주인공이 이디스 핀치가 쓴 일기를 읽으며, 증조대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가족의 계보를 그들이 머물렀던 방 하나 하나를 둘러보며 반추하는 형태로 차근히 흘러간다. 우리는 때로 바바라 핀치(Barbara Finch)가 되어서 한 물 간 아역스타가 되어버린 그녀가 어떻게 비명을 지르는지 듣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 말도 못 하는 아기, 그레고리 핀치(Gregory Finch)가 되어 핀치 가문 특유의 환상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어쨌거나 핀치라는 성을 지니고 태어난 이상 누구든지 예기치 못한 죽음, 불운한 죽음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듯이 핀치들은 죽어가고 또  죽어간다. 빌어먹을 가문의 뿌리깊은 저주.


이야기의 정점은 역시나 이디스 핀치의 오빠, 루이스 핀치(Lewis Finch)다. 가벼운 마약 중독이었던 그는 정신과에 다니며 약을 중단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환상 여행을 시작한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고, 너무 반복적으로 외로웠던 루이스는 공장에 다니며 고등어를 절단하는 동안 행복한 상상을 빚어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상상은 점점 변질되어 마침내 현실을 가혹하게 침투한다. 이 글의 처음을 차지하고 있는 저 황금 왕관 수여식 장면은, 루이스의 상상 중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다.


나 역시 이런 굴레에 대해 약간 알고 있다. 이디스 핀치가 독백했듯 "집을 볼 때면, 그들의 상상력과 고집과 광기의 역사를 볼 때면... 뭐든 다 가능할 것만 같다."


그러나 오직 가문이라는 프레임만으로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엔, 나는 삶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래서 반대 증거들을 모으는 것만이, 그 증거를 토대로 가급적 그들과 멀리 떨어져 아늑한 생활을 이룩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굴며 살려고 애썼다. 그러한 마음을 어째서 육중한 소설도 아니고 한낱 게임 따위가 후빈단 말인가. 어디 건방지게 어드벤처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감히, 네가 뭔데, 뭘 안다고, 가짜 주제에, 지어낸 이야기, 끄적거린 낙서 주제에.


어쩌면 우리가 가진 게임에 대한 무수한 오해들은 만화에 대한 그것만큼이나 편견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가벼울 것이다, 재미와 자극과 흥분만을 추구할 것이다, 소비자의 지갑만을 노리는 얄팍한 눈속임일 것이다 기타등등 블라블라. 그러나 <이디스 핀치의 유산>이 보여주었듯 플레이하는 개개인을 파고드는 훌륭한 스토리,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섬세한 인물의 창조는 게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이 자본의 힘인지, 작가의 역량인지, 알 수 없는 요소의 우연적인 조합 덕분인지는 결코 규명할 수 없을테지만.


이야기의 말미에 가까워지면서, 우리 플레이어는 화자인 이디스 핀치가 아니라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카타르시스는 절정에 달하고, 촘촘하게 엮인 가족의 불행이 더 이상 사슬이 되지 않도록, 대물림 되지 않고 끊겨나갈 수 있도록, 우리는 저절로 기원(祈願)하게 된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실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비극적 가족사는, 그러한 기도를 통해 비로소 한 개 액자 속 소중한 얼굴로 변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울처럼 우리를 되비추며 삶의 기원(起源)을 묻는다.





이디스 핀치의 유산 Full Story https://youtu.be/j7se43QKVKo

이전 09화 인생은 오징어 게임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