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차 론다
낮에는 반팔만 입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아침저녁으로는 경량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빠르게 변하는 기온 탓에 반팔 위에 경량패딩을 입은 채 론다로 향했다.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옷 입는 법을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데 사계절 옷을 다 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이구나.
찬 공기가 가득한 이른 아침, 론다에 도착했다.
론다는 눈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120미터 협곡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론다의 메인 스팟은 협곡이 갈라놓은 두 마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누에보 다리인데, 18세기에 무려 40년이 걸려 만들었다고 한다.
누에보 다리는 협곡의 밑바닥에서부터 120미터를 길게 뻗은 돌다리인데, 앞으로 백 년은 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이 다리를 지은 사람들은 높은 강도의 노동으로 힘들었겠지만 그 이후 3세기를 거치는 동안 많은 이들이 편리하게 살 수 있었다.
론다에는 누에보다리 하나 보러 갔다. 보통 1박을 안 하는 도시라기에 나도 거쳐가는 일정으로 계획하고 들렸다. 4시간도 채 보내지 않은 론다에 푹 빠져 1박을 안 한 것이 아직까지 후회로 남을 줄 모르고 말이다.
다시 론다에 가는 날이 온다면 누에보 다리가 잘 보이는 숙소에 가서 1박을 하며 론다의 모든 시간을 즐겨보고 싶다.
우선 누에보 다리 바로 밑에 있는 절벽 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절벽 위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보겠나 싶어서 두근거렸다.
며칠 전 바르셀로나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 후 스페인에서의 샷 추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느낀 나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매일 커피를 마시다가 제대로 된 커피를 못 마신 탓에 샷을 들이부어야 했다.
반대로 엄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는데 론다 카페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아 에스프레소와 얼음물을 주문했다. 그러나 얼음물에 에스프레소를 붓는 순간 얼음이 전부 녹아 커피맛이 살짝 나는 물이 되었다. 커피맛이 맘에 들지 않던 엄마는 카페에 앉아있는 것이 지루해 보였고 그걸 알아챈 나는 근처나 한 바퀴 걷자고 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누에보다리 아래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다리 아래에서 협곡 위에 위치한 집들을 보니 정말 사람이 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아찔한 높이였다.
협곡의 절벽 위 만들어진 마을의 모습은 실제로 보니 더 대단했고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멋진 광경을 선물해 주었다. 스페인에서 봤던 모든 광경 중 자연경관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을 꼽자면 감히 '론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조용한 동네를 걷다 보니 아주 잠시나마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 달 살기를 한다면 이곳에서 해야겠다는 달콤한 상상도 해봤다.
이번 여행에서는 좋은 딸이 되어보자 다짐했건만, 빼곡한 스케줄에 지친 나는 엄마의 “여기 좀 봐바”라는 말에 툴툴거리고 말았다.
이왕이면 누에보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다리가 나오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누에보다리가 아닌 나의 다리가 나오게 열심히 찍고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나는 이게 뭐냐고 이러면 누가 론다인 줄 알겠냐며 한마디 했고 엄마는 다시 찍어 주겠다며 열심히 허리를 꺾었다.
하,, 그때의 나를 한대 콱 쥐어박고 싶다.
왜 몰랐을까 소중한 건 인생샷이 아니라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란 걸.
그곳에서 엄마가 찍어준 사진은 몇 개월째 내 SNS 프로필사진이 되었다.
애정이 담긴 사진은 이렇게나 이쁘다.
스페인 여행기를 쓰는 지금은 11월, 선선하고 뼈까지 시원해지는 공기에 론다가 생각났다.
시리다는 것과 시원하다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지금은 기분 좋은 시원함이다. 시원한 바람이 론다에서 있을 때의 날씨를 생각나게 한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풍경과 비슷한 거라곤 하나도 없다. 그래도 생각나는 이유는 론다에서의 온도와 바람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시각에 의존을 많이 하는 내가 이러한 소리와 바람으로 론다를 떠올리다니, 론다는 내게 깊게 남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