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일 차 바르셀로나
짧은 기간에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가보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와 나의 첫 유럽여행인 만큼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고 싶어 무리한 일정을 세웠다.
그리고 4월의 따뜻한 어느 날 스페인에 도착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도착한 탓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어딘가 불시착한 지친 영혼의 상태로 쓰러지듯 잠이 들었지만 시차 공격으로 인해 얼마가지 못해 눈이 떠졌다. 제대로 못 잔 탓일까,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서일까, 꼬르륵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호텔 조식이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내려갔고 엄마가 비싼 비타민이라며 챙겨준 오쏘몰도 잊지 않고 먹었다. 한국에선 비타민 한 알도 챙겨 먹지 않던 내가 스페인에서는 많이 걷고 더 많이 보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먹어야 했다.
50대 엄마의 체력을 힘겹게 따라가는 서른이 된 나. 뭔가 바뀐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아침 해가 뜨면서 스페인의 색깔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가우디의 나라답게 알록달록 이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에 가우디투어가 잡혀있어서 그전까지는 푹 쉬려고 했지만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던 터라 오전부터 밖으로 나갔다.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으로 간 곳은 람블라스 거리였다.
여유로워 보이는 현지인들과 어딘가 들떠 보이는 관광객들이 보였고, 나도 함께 들뜨기 시작했다.
스페인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소매치기가 뜰 정도로 소매치기가 매우 많다.
특히 바르셀로나, 특히 람블라스 거리에 굉장히 많다고 한다. 살면서 소매치기라곤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지만 워낙 악명 높은 곳이라 들뜬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겁먹은 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열 걸음 걸을 때마다 엄마에게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엄마와 나는 거리를 걸으며 틈틈이 서로의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둘 다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점심을 먹으며 여행 기분을 내고자 낮술을 했다.
스페인에서는 음식에 거의 대부분 술을 곁들이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시키면 술과 곁들일 음식을 주는 타파스 문화가 발달되어 술을 안 시키면 손해 보는 느낌이랄까?
거기다 양질의 값싼 와인, 알코올쓰레기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레몬맛 맥주 클라라, 달콤한 맛에 계속 먹다 보면 취하는 샹그리아까지.
기분이 좋을 정도로 취기가 오른 채 걷는 이 거리가 마냥 즐거웠다.
다행히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은 채로 람블라스 거리에서의 쇼핑을 끝내고 가우디투어를 하러 갔다.
가이드님이 쉬지 않고 뭘 많이 설명해 주었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갔으면 더 많이 보였을 걸 아쉽기도 했다. 그랬다면 엄마에게 아는 체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때 처음으로 전날까지 야근시킨 회사를 원망하기도 했다.
가우디 특유의 곡선이 잔뜩 묻어난 까사밀라를 보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외관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봐서 엄청난 감동이라기보다는 드디어 이 장소에 왔다는 것이 더 의미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들고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가득 채운 스테인드 글라스에 비친 빛에 감탄이 나와 내가 스페인에 왔다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 역시 가우디구나.
어릴 적부터 미술학도였던 나는 초등학생 때는 과학상상화, 중학생에는 백일장과 시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 고등학생에는 대학교 실기대회와 학교 대표로 나가는 각종 대화들을 다니며 미대생을 꿈꿔왔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재밌었고 상도 받고 칭찬도 받고 다들 잘한다고 하니까, 그때 그 애매한 재능이 가혹할 정도로 현실을 깨우치게 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미대에 입학한 내가, 미대생이었던 그때, 바르셀로나에 와서 이곳을 봤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다른 꿈을 꾸었을까?
실기실 외에 도서관을 자주 갔던 나는 다음생에는 미술학부 말고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단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건축학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건 다다음생에 해볼까 라는 기분 좋은 상상쯤은 해볼 수 있지 않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감동은 잠시 묻어둔 채 구엘공원으로 향했다.
한낮의 구엘공원은 덥다 못해 뜨거웠다. 스페인의 태양은 다르다더니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해가 쨍해서 더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구엘공원을 빼곡히 채운 색깔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는 것.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엄청난 공간감과 빛, 구엘공원의 곡선미와 선명한 색깔, 내가 지금 바르셀로나에 왔구나.
그놈의 꿀대구,
스페인에 가면 꿀대구를 꼭 먹으라던 지인의 말에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한 타파스바에 갔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타파스 바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며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일을 안 하는 걸까 부러웠다.
가게 앞에서 웨이팅을 도와주는 직원에게 내 이름은 지아, 2명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띠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여행 내내 엄마는 내게 지아가 아닌 띠아라고 불렀다.
다시 한번 엄마가 나를 띠아라고 부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그날의 꿀대구와 맛조개, 푸아그라 안심과 츄러스는 영영 잊지 못할 거야.
아참 클라라도 ¡Salud! (건배)
바르셀로나 중심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아침부터 부리나케 짐을 챙겼다.
도착하자마자 밤이었던 탓에 벌써 3일 차 아침이었다.
아직 바르셀로나의 반의 반도 못 즐긴 것 같은데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꼬불꼬불한 산길 같아서 멀미와 엄청난 사투를 하기도 했다.
도착하자마자 찬 공기에 멀미는 싹 가시고 엄마와 손을 잡고 걸었다.
유명하다는 검은 성모상도 보고 갑자기 울려 퍼지는 성스러운 종소리도 들었다.
수도원 내부에는 소원을 비는 양초가 있어서 2유로에 양초를 샀다.
양초를 켤 수 있는 불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엄마의 양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물어보니 근처에 있던 외국인에게 "헬프미"하고 양초를 보여줬다고 한다. 잘했다는 대답을 옅은 미소로 대신했다.
양초를 놓을 자리를 찾은 엄마는 살포시 양초를 올려놓은 후 두 손을 모아 진지하게 소원을 빌었다.
환하게 켜진 불만큼이나 빛나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후, 나도 두 손을 모았다.
방금 엄마가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짧지만 진심이 담긴 소원을 빌고 내려오는 길에 굿즈샵에 들렸다.
수도원 굿즈샵..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20년 전까지 성당을 다니며 세례도 받아 세례명까지 있는 아녜스 자매님, 우리 엄마는 현재 성당에 발 끊은 지 오래된 냉담신자이다. 그럼에도 천주교 굿즈라면 눈 돌아가던 엄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유난히 신나 보이던 엄마. 엄마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내가 성수동 소품샵가면 눈 돌아가는 게 엄마를 닮았구나.
그곳에서 지름신이 강림한 엄마를 자제해보려 했지만 영롱한 액세서리에 나도 같이 돌아버렸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팔찌를 착용해 봤는데 왠지 이번 여행에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아서 구매했다.
살까 말까 고민될 때에는 좋게 의미 부여해 버리면 장땡이다.
굿즈샵 앞에서 딸과의 커플 팔찌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남을 표현한 엄마의 모습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엄마의 소원을 뭐였을까,
내 소원은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거였는데 이루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