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흔히 세상사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곤 합니다. ‘좋은 것’ 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들이 있으실 겁니다. 부유함이나 안락함, 건강 같은 것들이죠. ‘나쁜 것’하면 떠올리는 것들은 아마 그 반대되는 것들일 것입니다. 빈곤함이나 풍파 많은 삶, 병든 육체 같은 것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반사적으로 좋은것과 나쁜 것의 이분법적인 가치판단을 해 버리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열한 좋다/나쁘다의 판단은, 육체의 생명을 보전하기에 유리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가치판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사를 들여다 보면, 앞서 언급한 ‘좋은 것’들을 좇으며 살아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그러나 희한하게도, 인간은 그 ‘좋은 것’에 위배되는, 그러니까 이 3차원적 생존에 전혀 유리할 것이 없어 보이는 판단과 행위들을 생각보다 굉장히 많이 하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죠. 굉장히 무모해 보이는 사업을 벌리는 기업가나, 험한 산을 정복하는 등산가들, 혹은 전혀 돈 될 것 같지 않은 연구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 당장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창작을 해나가는 예술가들처럼 말이죠.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전화위복’,이런 개념을 굉장히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게 쓰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말처럼 고난이나 시련이 한 존재에게 굉장한 도약의 계기,굉장한 자유로움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미 체득해왔고, 그것은 우리의 유전자와 영혼에 이미 스며 있는 아주 익숙한 사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독한 불운이라 생각했던 어떤 사건이, 시간이 흐른 후에, 사실은 내게 지극한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과연 나쁜 일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근원적인 사랑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구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좋다/나쁘다라는 인식은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 즉 가치 판단이지 그 사건 자체에 대한 투명한 시선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들은 3차원적인 육체의 생존본능에 위배되는 것들인 경우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유독히 스스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떠한 부분에 대한 사건이 발생 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나쁜 일’이다,라는 가치판단을 더 쉽게 내리고 그것에 크게 휘둘립니다. 나를 흔드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은 ‘인간사가 다 그렇지’‘시간이 약이다’‘그냥 잊자’하며 뭉뚱그려 버리거나, 마음속 깊이 덮어놓고 외면을 해 버리죠. 그렇게 깊이 덮어두고는 정말로 한동안은 그저 잊고 지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생각나서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거나, 비슷한 패턴의 사건에 느닷없이 또 당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고질적으로 얽메이는 부분이 있다면, 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에 대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강한 바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본질의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진짜, 찐으로 원하는 것을 주기에 내가 얽메이는 부분이 뭔지 우선 확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자아적으로 덮어놓고 외면하고, 혐오하고, 보지 않으려 해도요.
우리가 유난히 분기탱천해서 비판하고, 보기 싫어 하는 타인의 모습이 있을텐데요. 그것이 타인이 저지른 것이라 할 지라도, 내 눈앞에서 창조되었고 그것에 나의 감정적 동요가 크게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은 또한 내 에너지로 내가 창조한 나의 현실일 것입니다. 곧 내가 싫어하는 타인의 어떤 행동은, 내 안에 있는, 내가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는 어떤 부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좋다/나쁘다가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우리는 나쁜 것,싫은 것이라 치부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던 내 스스로의 모습들을 그 어떤 외부의 잣대 없이 그냥 다 ‘내 것이었구나’ 하고 가슴깊이 받아들여보세요. 그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꾸준하게 새싹에 물을 주며 키우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노력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 대한 받아들임과 인정이 점점 깊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세상과 타인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세상과 나 사이의 벽을 점점 더 허물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세상에 벽을 느끼지 않는다면 세상도 나에게 더 이상 벽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에 대해 갈망하면서도, 또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독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사랑’에 대해 더욱 더 깊고 넓은 인식의 확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이해와 확장과 나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떠올렸던 좋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지요. 사랑은 항상 그 이상입니다. 사랑에는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무한대의, 무경계의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근원적 사랑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이제 바라봐 주기만 하면 됩니다. 나부터 그렇게 바라봐 주세요.
명상하실 때나, 산책하실 때, 혹은 자기 전에 매일같이, 우리에게는 그 초월적인 사랑의 힘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있음을 상기하시면서 오늘도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