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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는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 남자인지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마땅한 지 잘 모르겠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인아 너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고 말했다. 인아는 살짝 웃으며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민됐다. 주말에 인아의 아버지에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 싶었다. 인아의 아버지는 지금 인아의 마음을 알까.
사실 연애를 할 때에도 인아가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자에겐 명백하게 실이라고 자주 말해 인아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려웠다. 그런 인아가 어느 날 서점에서 같이 책을 구경하다 덤덤한 말투로 ‘우리 방 하나는 서재로 써야겠지?’라고 말한 건 내게 산뜻한 충격이었다. ‘우리가 만약 같이 살면’이라는 가정법도 하지 않고 이미 가정된 어법으로 말했다. 마치 살 집도 계약을 했는데, 남는 방이 하나 있어 무슨 용도로 쓸지 고민하던 예비 신혼부부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 수순을 밟았다. 인아가 ‘스드메’의 과정을 통과하는 건 신기했다. 화장도 잘하지 않는 인아가 겹겹이 올리는 화장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고,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것도, 카메라를 보고 해사하게 웃음 짓는 모습도 나에겐 인아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은 인아의 부드러운 자아가 등장하며 잘 해결되는 듯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인아의 발언은 다시금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인아는 신부 입장을 아버지와 하기 싫다고 했다. 엄마랑 입장하려고. 그러면…아버지는…? 그냥 앉아있으면 되지. 아버지는 알겠다고 하셨어? 아니 이번 주말에 얘기하려고. 인아는 그냥 혼자 입장하는 것도 생각했었다가, 왠지 엄마에게 딸과 함께 입장하는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은 ‘날 키운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라는 뜻이었다. 그런 인아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인아 너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그리고 인아는 나에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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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포장 잘된 한우 세트를 사고, 때깔 좋아 보이는 과일을 사서 인아네에 도착했다. 인아의 어머님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위 왔냐며 능청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인아의 아버지 또한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했다. 인아는 그 이야기를 언제 할까. 인아네 가족을 보며 웃으며 인사할 때도, 근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선물을 전달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밥을 먹고 과일을 먹으며 쉴 때, 인아의 부모님은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냐고 물었다. 인아는 우리의 진행 정도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아의 눈빛이 바뀌는 걸 목격했다. 지금이었다.
- 나 근데 신부 입장할 때 엄마랑 입장하고 싶어
인아의 어머님은 눈이 동그래졌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본인의 남편을, 인아의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으신 것 같았는데, 인아의 당돌함이 웃긴지 코웃음을 쳤다. 인아는 그런 아버지의 웃음을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았지만 꼬투리 잡지 않았다. 인아의 어머님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다급한 표정으로 그거 원래 아버지랑 입장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원래 같은 게 어디 있어. 인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장 서방 우리 인아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인아의 어머니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아… 네, 요즘엔 어머니랑도 많이 입장한다고 하더라고요.’라는 인아의 부모님이 원하지 않을 대답을 했다. 그래도 아빠랑 입장해야지. 인아의 아버지는 아무 말하지 않으면서 표정을 구기고 인아를 보다, 결국 한 마디를 뱉으셨다.
- 너 내가 결혼에 얼마 보탰는지 알지?
인아는 웃으며 그럴 줄 알았어,라고 작게 말했다. 인아의 어머님 눈동자가 인아로 아버님으로 바쁘게 굴러갔다. 그럼 나 혼자 입장할게. 인아가 말했다. 다시 한번 아버님이 코웃음을 쳤다. 모두가 말하지 않았지만 느끼고 있었다. 인아는 어머님이랑 입장하거나, 혼자 입장하고 싶은 것보다 더 명확하게는 아버님과 입장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걸. 팽팽한 긴장감에 비싼 한우가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인아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일단 아버님에 대한 일화 같은 걸 이야기한 적이 딱히 없었고, 스치듯 하는 모든 말이 부정적 뉘앙스였다. ‘우리 아빠 옛날 사람이라…’, ‘우리 아빠 그냥 일반 남자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인아의 마음에 드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인아가 생각하는 아빠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게 사실이다.
- 건방진 소리 하지 말고 원래대로 해
- 엄마랑 입장할 거야. 그렇게 알아
아버님은 인아를 쏘아보다 혀를 끌끌 차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님은 ‘왜 과일 더 먹지’라는 애먼 소리를 하다가 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인아 너는 왜 그런 생각을 해서 아빠 자존심을 상하게 해. 그것도 장서방 앞에서.
- 자존심?
- 딴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저 집은 아빠가 없나. 아빠 돌아가셨나. 아빠 새아빤가 그런 소리 할 거 아냐.
듣다 보니 인아의 입장이 돼서 나도 어머니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왜 신부는 꼭 아버지랑 입장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고, 아니 할 필요도 없는 걸까. 인아는 붉어진 눈으로 배를 한 움큼 베어 먹었다. 입안에 과즙이 퍼졌는지 입술을 모아 스읍 소리를 내며 과즙을 삼켰다. 오물오물 작은 입으로 다 씹어 넘기고는 인아가 나를 바라봤다.
- 부럽다. 남자들은 이런 걸로 고민할 일도 없고, 이런 걸로 부모님한테 건방지단 소리도 들을 일 없겠네.
인아의 어머님은 한숨을 푹 쉬었고,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인아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인아는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했는데, 붉어진 얼굴을 삭히려고 가는 듯했다. 어머님과 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내가 말했다.
- 인아가 어머님… 생각 많이 해서, 같이 입장하고 싶은가 봐요.
- 나야 괜찮지. 저이 자존심이 문제지.
그때, 왠지 겸손하면서도 옅은 미소가 어머님 얼굴에 퍼지는 것을 보았다. 뭐랄까, 실질적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돌아가는 길엔 인아에게 물었다. 정말로 아버님이랑 입장 안 할 거야? 인아는 단답으로 ‘응’이라고만 말했다. 더 묻지 않았다. 내가 유난이라고 생각해? 인아가 물었다. 아니, 인아한테는 어머님이 소중하잖아. 인아는 갑자기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나를 쳐다봤다.
- 만약 자기가 부모님 한 사람이랑 입장해야 된다면 누구랑 입장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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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의 질문은 계속 내 머릿속을 배회했다.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는데, 마치 어렸을 적 단골 질문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성인 버전 같았다. 어렸을 때도 어려운 질문이었고 여전히 어려운 질문이었다. 친구 녀석들에게 청첩장을 전달할 때마다 나는 그 질문을 했다. 만약 너네가 부모님 한 사람이랑 입장해야 된다면 누구랑 입장할래?
대답은 가지가지였다. 엄마랑 들어가고 싶은데, 엄마랑 들어가면 마마보이 같이 보일까 봐 걱정된다고 했고, 그래도 같은 남자니까 아빠랑 들어갈 것 같다고 하기도 했으며, 갑자기 할머님은 안되냐는 대답도 있었다. 대부분 본인과 유년 시절의 유대감이 깊은 사람과 그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했다.
- 왜? 인아 씨가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입장하고 싶어 해?
- 응. 어머니랑 입장하고 싶어 해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엄지를 척 들더니,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잘해봐라’라고 말했다. 그건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전우에게 받는 응원 같았다. 그날을 다시 떠올리면 분위기가 거의 전쟁이었으니 친구가 맥락 없는 응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치른 전쟁은 아니었지만.
하루는 인아가 웃긴 얘기를 해줄 게 있다고 했는데 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웃음을 못 참겠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간신히 진정하고 인아가 말했다.
- 아니 글쎄, 아빠가 갑자기 잘하는 거 있지 나한테. 그리고 예전에 잘해준 것까지 계속 이야기한다. 하다 하다 초등학교 때 나이키 책가방 사준 것까지 얘기하더라.
그 얘기엔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다음 인아의 말엔, 웃음이 바로 가셨다. 인아의 다음 말은 이랬다.
- 근데 만약, 우리가 딸을 낳아서 딸도 나처럼 자기랑 입장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할래?
인아는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 남자인지 확인하는 듯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마땅한 지 잘 모르겠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방금 내 표정이 인아의 아버지와 닮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인아의 질문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배회했다. 왜냐면 인아가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여 말했지만, 이것만큼은 가정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인 느낌이 들었다. 우물쭈물한 나를 보며 인아는 살짝 웃었다. 그리곤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