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이 지친 도시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농촌이 자리 잡고 있다. 자유로움, 한가로움, 맑은 공기, 숲과 나무 등 낙원을 상상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육십 대도 젊은 층에 속하는 고령화된 사회, 힘든 육체노동, 제값 받기 어려운 농산물의 가격 등 여기도 쉽지 않은 삶의 현장이다.
어디든 노동의 대가는 중요 관심사다. 농산물 ‘제값 받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라도 이런저런 대책을 세운다. 단골 대책 중 하나가 우리도 익히 아는 ‘직거래 장터’다. 사람들이 북적 될 만한 공터에 판매 공간을 만들어 주고, 홍보까지 해주면 더 좋다. 그럼 농민들이 농산물을 가지고 와서 직접 판매하면 된다. 한 치의 의심이 없는 확실한 대책이다.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이런 걸 두고 ‘관성’이라 한다.
그런데 농촌의 젊은이가 60대인데, 이들이 직거래에 적합한 농산물을 선택해야 하고, 적정 판매 수량을 판단해야 하고, 운송 방법을 찾아야 하고, 진열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격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판매 인력은 몇 명이 필요한지, 과연 감당할 용기가 나는 일일까? 그나마 영농조합이 운영되면 다행이나, 소규모 농산물 재배 농가에게는 그림의 떡일 거다.
그런데 기존의 ‘직거래 장터’에 대한 ‘관성’을 허무는 일이 일어났다. 울주군 ‘범서농협’이다. 농협 하나로마트 내에 설치한 ‘로칼푸드’라 이름 붙인 상설 직거래 매장에서다.
소규모 농산물 재배 농민 위주로 운영되니, 할아버지 할머니 농민, 젊은 귀농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회원으로 가입하고, 교육만 받으면 된다. 종류에 관계없이 직접 재배한 소량의 농작물을 판매할 수가 있다. 농협 내에 비치된 자동화 기계를 이용하여 농민 스스로 포장하고 가격 라벨을 붙이면 된다. 그런 다음 본인의 얼굴과 주소가 적힌 실명 코너(통상 1.5㎡정도)에 상품을 비치하면 끝이다. 유통·판매는 농협의 몫이다. 판매장 사용료로 매출액의 10%만 지불하면 된다. 물론 당일 수확, 당일 판매, 판매대금 즉시 지급이 원칙이라 한다.
판매 공간은 전체 매장의 10%를 할애하여 약 200개 농가가 참여한다고 한다. 1월부터 7월까지 참여 농가 전체를 기준하면 월평균 매출액은 84만 원이었다.(이글 쓴 당시가 꽤 오래전이고, 이후 울산을 떠났기에 지금은 확실하지 않음을 양해 바랍니다.) 하루에 출하하는 40∼50 농가가 평균 7∼8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니 농촌의 적지 않은 소득이다.
대략 이런 품목들이다. 봄에는 오이, 가지, 고사리, 두릅 등 약 190개 품목, 여름에는 깻잎, 미나리, 토마토, 복숭아 등 약 210개 품목, 가을에는 고구마, 단감, 배 등 약 110개 품목, 겨울에는 호박, 말린 채소 등 약 90개 품목이라 한다. 시골 먹거리가 거의 취급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범서농협의 매출도 30%나 증가했다는 점이다. ‘로컬푸드’가 미끼 상품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주민들은 농민들이 직접 소규모 먹거리로 기른 싱싱한 농작물을 살 수 있어서 좋고, 농민들도 어떤 농작물이든 손쉽게 판매할 수 있어 좋고, 농협은 ‘로컬푸드‘로 전체의 판매 수입이 늘어나서 좋다. 모두가 상생하는 성공 모델이 탄생했다. 기존 ‘직거래 장터’에 대한 ‘관성’을 깬 결과다.
관성은 가장 안정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실 바위가 흙으로 변하듯 퇴보와 소멸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새로운 에너지를 가하여 관성에서 탈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거꾸로 흙이 단단한 청자·백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범서농협 ‘로칼푸드’ 매장도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노령 농촌과 젊은 도시를 연결해 보는 상상을 마구 마구 한다. 농촌이 이렇게만 되면 좋겠다. 멍상(멍 때림)의 공간 + 차박의 공간 + 힐링의 공간(빈 농가 활용) + 일손나누기 공간 + 도시민과 농민 농사 자매결연 (고구마처럼 평소 관리보다 수확 때 일손이 필요한 작물 등) 공간 등 등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