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아침 등산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산들바람, 맑은 공기, 숲 내음,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새들의 소리도 좋다. 그리고 땀도 흘리니, 자연히 몸과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런데 ‘즐거움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으니, 여기에도 예외 없이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모기’란 놈이다.
이놈들의 집요함은 끝이 없다. 한번 정하면 끝까지 따라온다. 공격하는 솜씨도 예측불능이고 종횡무진이다. 이런 놈이 한 둘이 아니니 결국은 당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의 즐거움은 어디 가고 상처만 남기 일쑤다.
그래서 이놈들을 퇴치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목숨 걸고 덤비는 놈한테는 삼십육계 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놈들에게도 약점은 있다. 바람이다. 몸무게가 적으니 바람에 날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다. ‘부채’다. 모기가 달려들면 쓱 날려버리면 된다. 부채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이다.
부채가 땀을 날리는 것이야 본래의 용도니 그렇다 치고, 가만히 살펴보면 쓸모가 많다. 뜨거운 햇빛도 막아주고, 옛 선비의 운치도 있다. 접어서 쥐면 작은 방어무기로도 되니 든든하다. 그리고 한여름 고관대작님들에겐 ‘절전 캠페인용 액세서리’로는 제격이다. 그런데 부채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관심과 애정도 커졌다. ‘마음의 작용’이 묘하다.
사실 우리는 이미, ‘가치를 재발견하면 관심이 커지고’, ‘관심이 커지면 많이 보이고’, ‘많이 보이면 애정이나 사랑이 일어나는’, 순차적인 ‘마음의 작용’을 알고 있다. 김춘수의 ‘꽃’이나, 어린 왕자(쌩떽지베리)의 ‘꽃’ 이야기에 감동하니 그렇다. 그래서 어떤 대상물을 사랑하게 하려면, ‘마음의 작용’에 따라, ‘가치의 재발견’에서 출발하는 것이 순서다.
먼저 ‘무궁화’다. 나라꽃이라 많이 보급은 되었지만, 사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러니 “무궁화를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라고 안타까워하는 학부모가 있을 정도다. 그럼 어떻게 해야 광복절이 아니라도 무궁화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식목을 의무화하거나 주입식 세뇌교육도 방법이다. 그러나 강제적 대책은 성공도 어렵고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는 무궁화를 꽃으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꽃의 아름다움에 흥겨워한다. 그럼 다수가 사랑할 보편적 가치는 없을까? 있을 것도 같다. 잘 가꾼 꽃핀 무궁화 한그루는 아름답기까지 하다(사진). 그러니 무궁화도 ‘고급 정원수’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학교 정원에 무궁화 한 거루만 멋지게 가꾸어도 교육적 효과는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울산의 ‘오색팔중동백’도 그렇다. 일반 동백이 붉은 단색 꽃인데 비해 5색 꽃이 핀다. 그리고 꽃잎이 8겹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꽃이 피면 오색 단장한 청아한 조선 미인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에 울산을 점령한 가등청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던 것으로, 1992년 돌아와서 현재는 울산시청에 한 그루만 있다. 그래서 가치가 더 크다. 그러나 희소성은 소수에만 즐거움을 줄 뿐이다. 만일 이 한그루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울산시 농업기술센터에서 2세 묘목 100주를 분주하여 공을 들이고 있다. 묘목들이 성목이 되면 ‘오색 팔중동백 공원’도 가능해진다. 울산에 풍요로움 하나를 보탤 수도 있겠다. 이제 오색팔중동백에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사실 풍요로움은 자연이나 문화재와 같은 큼직한 것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잔의 차’나 ‘한 송이 꽃’, ‘한그루의 나무’처럼 일상의 것들 속에서 우리는 더한 맛과 멋을 느낀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그 무엇일지라도, ‘가치를 재발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입혀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러면 김춘수의 ‘꽃’처럼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