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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Oct 16. 2023

2. 오감 사용 설명서: 기호의 형식

질문하는 언어학

[교수] 그럼,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볼까요? 2조, 문제 읽고 답해 주세요. 


[학생2] 예, 2조, ‘에이뿔 주시죠’입니다. 문제는 ‘기호의 형식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저희 조에서 찾은 답은, 기호의 형식이란, 사람이 가진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각적 형식과 청각적 형식, 후각적 형식과 미각적 형식, 촉각적 형식이 있습니다. 


[교수] 예, 잘 찾았습니다. 이제 우린 그게 각각 무얼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너무 긴장하진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며 하나하나 따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시각적 형식부터 살펴보죠. 시각적 형식이란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걸 말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시각적 형식을 가진 것들입니다. 눈은 시각기관이고, 그러한 시각기관에 의해 감지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시각적 형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머지 네 가지 형식을 말해 볼 수 있을까요? 


[학생2] 예, 눈으로 보이는 것이 시각적 형식이라면, 귀에 들리는 것은 청각적 형식이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후각적 형식이며, 혀로 맛을 볼 수 있는 것은 미각적 형식, 피부로 감촉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촉각적 형식입니다. 


[교수] 예,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럼, 실제로도 잘 적용할 수 있는지 볼까요? 학생, 학생 앞에 놓여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세요. 아무것이나 좋아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나 골라 주세요. 


[학생2] 예, 지금 수업하는 이 교재로 하겠습니다. 


[교수]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 책으로 이야기를 해 보죠. 질문하겠습니다. 우리가 방금 배운 기호의 형식들 중에서 그 책이 가진 형식은 무엇인가요? 


[학생2] 예? 어... 그러니까... 음...


[교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방금 학생이 잘 설명해 준 대로 체크해 보세요. 하나하나씩 말이죠. 우선 그 책이 시각적 형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나요? 


[학생2] 예? 시각적 형식이요? 음... 그런가? 어... 아마도... 예, 그럴 것 같아요. 


[교수]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학생이 그 책을 눈으로 볼 수 있나요? 그렇다면, 그 책은 시각적 형식을 가진 것입니다. 눈이라는 시각기관에 의해 감지될 수 있는 대상이니까요. 이제 알겠죠? 그게 어떤 대상이 시각적 형식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다른 것도 해 보세요. 


[학생2] 아, 예. 그럼, 이 책은 시각적 형식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 청각적 형식에서는 이 책은... 청각적 형식? 귀에 뭔가 들려야 하는데, 이 책은 그냥 지금 여기서는 따로 소리가 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니 책장을 넘기면, 아니면 떨어뜨렸을 때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고...


[교수] 청각적 형식은 너무 어려운가요? 그럼, 촉각적 형식부터 살펴볼까요? 그 책은 손으로 만져지나요? 


[학생2] 예, 만질 수 있어요. 표면의 감촉이 느껴져요. 그러면, 이 책은 촉각적 형식은 가진 것 같습니다. 


[교수]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계속 해 보세요. 다른 형식들도. 


[학생2] 예, 다른 것들... 시각적 형식, 촉각적 형식은 끝났고, 다른 거면, 음... 미각적 형식? 음... 이 책은 맛이... 맛을 볼 수가... 음...


[교수] 관찰자로서 약간 난감한 순간이네요. 학생이 연구자로서의 정신이 매우 투철하다면 그 책을 지금 좀 맛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사실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나보고 하라고 해도 나 역시 자신이 없어요. 아마 큰맘 먹고 누군가 시도해 본다면, 아마 책에서도 무슨 맛이 날 수 있을까요? 냄새는 어떤가요? 


[학생2] 냄새요? 킁킁. 무슨 냄새가 나나? 아, 새 책 냄새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글쎄요, 확실히 잘... 모르겠...


[교수] 아마, 후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 아니 나보다도 후각이 훨씬 덜 발달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책에서 별다른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고 할 것 같아요.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이 하나 있습니다. 관찰자에 따라 관찰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후각이 매우 발달한 사람이라면 그 책은 분명히 어떤 냄새를 가질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그 책은 후각적 형식을 가진 대상일 겁니다. 그러나 후각이 그리 발달하지 못하였거나 어떤 문제가 있어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책은 후각적 형식을 가지지 않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다른 형식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시각적 형식이 감지될 수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청각적 형식이 감지될 수 없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미각적 형식이 감지될 수 없고, 피부에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촉각적 형식이 감지될 수 없는 것이죠. 학생 앞에 놓인 그 책에 관해 나와 학생은, 그 책이 시각적 형식과 촉각적 형식은 분명히 가지지만, 그 밖의 다른 형식들 즉, 청각적 형식이나 후각적 형식, 미각적 형식을 가진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청각적 형식의 경우, 그 책 자체가 가만히 놓여 있을 경우엔 그 책에서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만약 바람이 불어 그 책의 책장이 넘겨지거나 어떤 일로 그 책이 책상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경우 각각 펄럭이는 소리나 쿵 하는 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은 어떤 조건 하에서는 제한적으로 청각적 형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학생3] 선생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그렇다면 저 책이 어떤 형식을 갖는다고 우리는 어떤 확실한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없는 건가요? 


[교수] 좋은 질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짚어 보면 좋을 문제죠. 이제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마다 저 책이 가진 형식에 대해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관찰자에 따라 관찰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학생이 궁금한 건,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그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사실은 학문이 추구하는 게 그런 걸 거예요. 개개인이 다르게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어떤 일정한 결론으로 가능한 한 수렴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객관적인 잣대가 필요할 것입니다.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그리고 제삼자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상식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음식의 맛을 분석하고 평가할 때, 일반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과 요리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다를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미각을 가졌지만, 요리사와 같은 전문가들은 매우 민감하게 훈련된 미각을 통해 음식의 맛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한 전문가의 영역에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마련된다면, 그게 하나의 공통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다루던 예로 돌아와, 저 책이 가진 형식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걸 전제로 하여, 각각의 감각에서 그것이 감지된다고 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도 엄밀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에는 청각적 형식의 경우에서처럼 상황별 요인이 추가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개개인의 감각 결과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상식을 넘어 객관성과 엄밀성을 가지는 수준의 결론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하려고 굉장한 노력을 기울일 수는 있겠죠. 모든 대상에 대해 그것이 어떤 형식들을 가지는지에 대해 완벽한 연구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런 연구가 완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쩌면 기호의 형식에 대한 연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감각기관에 국한된 것이니까요. 가깝게는 동물의 종에 따른 차원에서나 멀게는 외계의 다른 어떤 지적 존재로까지 관심을 넓혀 볼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겠죠. 이제 겨우 문제 두 개 풀었는데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10분 정도 쉬고 세 번째 문제로 넘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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