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언어학
[교수] 그렇다면, 이제 방금 배운 기호의 정의를 실제로 적용해 볼 차례입니다. 다시 1조로 돌아왔나요? 문제 풀어 주세요.
[학생6] 예, 1조 ‘집에 가고 싶죠’입니다. 문제는 ‘‘신호등’을 기호로 간주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저희 조에서 정리한 바로는, 신호등이 기호인 이유는, 예를 들어, 빨간 색깔이 켜지면 길을 건너지 말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빨간 색에 건너지 말라는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까 신호등이 기호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 잘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정교하게 얘기해 볼까요? 방금 말한 신호등의 경우에서, 일정한 형식에 해당하는 건 뭐죠?
[학생6] 예, 빨간색이라는 색깔, 그러니까 빨간색이라는 시각적 형식입니다.
[교수] 그렇죠. 그럼,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일정한 메시지란 무엇인가요?
[학생6] 건너지 말라는 거 아닐까요?
[교수] 잘했어요. 신호등의 빨간색에 건너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거군요. 빨간색은 시각적 형식이고 건너지 말라는 게 그 내용이죠. 그래서 신호등은 일정한 시각적 형식에 일정한 내용이 결합되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에 다른 색깔은 없나요?
[학생6] 예, 있습니다. 파란색이요.
[교수] 거기에도 일정한 내용이 결합되어 있나요?
[학생6] 예, 일정한 내용이 있습니다. 건너라는, 건너도 좋다는 뜻입니다.
[교수] 그렇다면, 신호등은 빨간색에는 건너지 말라는 의미가, 파란색에는 건너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거네요? 두 개의 시각적 형식에 두 개의 다른 내용이 각각 결합되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신호등은 두 개의 기호로 되어 있는 거네요? 그냥 기호라고 부르기보다는 뭔가 추가적인 다른 이름을 붙일 법도 한데요. 혹시 학생 뭐 떠오르는 말 없어요?
[학생6] 음... 체계요? 기호 체계?
[교수] 아주 훌륭합니다. 그래요, 신호등은 간단한 예이지만, 두 개의 기호로 되어 있으니 기호 체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호등에 노란등도 있죠? 노란등도 일정한 시각적 형식에 일정한 메시지가 결부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건널 거면 빨리 건너란 말인가요? 아니면 건널 생각이라면 그냥 단념하라는 말인가요? 일단 주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건너고 있는 사람은 빨리 건너고, 아직 건널목에 들어선 게 아니라면 다음 신호를 기다리라는 걸로. 여하튼, 이렇게 세 가지 기호로 구성되어 있다면 신호등은 하나의 훌륭한 기호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남아 있습니다. 신호등이 기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가릴 수 있었죠? 신호등이 기호인지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뭐였냐는 겁니다.
[학생6] 예? 음... 그니까... 어... 어떤 걸 물으시는 건지...
[교수] 어려운 걸 묻는 건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걸 내가 다시 묻는 겁니다. 학생이 잘 말해 주었듯이 신호등은 기호인데, 왜 그걸 기호라고 판단할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어떤 것이 기호인지 아닌지를 가려 줄 수 있는 것, 그게 뭐냐는 거죠.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것이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잘 생각해 보세요.
[학생6] 혹시 신호등이 일정한 형식에 일정한 내용을 가졌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교수] 물론이죠. 방금 우리가 확인했잖아요. 그렇다면, 학생이 방금 말한 게, 그게 뭐냐는 겁니다. 일정한 형식에 일정한 내용을 가진 게 뭐냐는 거죠.
[학생6] 그건 기호죠. 기호의 정의요.
[교수] 예, 그렇습니다. 기호의 정의죠.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신호등이 기호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데 필요한 게 뭐죠? 한마디로?
[학생6] 음... 기호의... 기호의 정의요?
[교수] 그래요!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신호등이 기호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기호의 정의입니다. 이때, 기호의 정의라고 했을 때,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면 뭐가 될까요? 정의라는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은 아니죠. 일상에서 그런 뜻으로 쓰는 말이 무엇일까요? 기호의 정의를 다른 말로 바꾸면 무엇일까요? 그렇게 바꾸어 보면 기호의 정의라는 말이 더 잘 다가옵니다. 학생이 한번 답해 보세요.
[학생6] 특성이요?
[교수]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에요.
[학생6] 그럼, 성질?
[교수] 특성이나 성질이나 같은 말 같은데요.
[학생6] 예... 그러면... 본질?
[교수] 역시 비슷한 말이지만 내가 찾는 답은 아니에요. 누구 다른 의견 없나요?
[학생7] 혹시 조... 조건 아닌가요?
[교수] 맞습니다. 내가 원하던 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문에서 정의라고 하는 건, 바로 일상에서 조건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호의 정의란, 곧 기호의 조건, 기호가 되기 위한 조건인 겁니다. 아까 신호등이 기호인 건, 신호등이 기호의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형식에 일정한 내용이 결합된 것이 기호의 정의, 기호의 조건이니, 신호등이 그것에 맞아 기호라고 불릴 수 있는 거죠. 어떻습니까? 기호의 정의가 사실은 기호의 조건이라는 것이라면, 이해하기가 더 수월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쉽게 기호의 조건이라고 하지 기호의 정의라고 말하나? 그건, 학문이 일상과 구별되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어떤 말을 가져다 쓸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말을 만들고 싶은 거죠. 그렇게 하면, 일상에서 사용되는 말이 지닌 상식적인 의미에 물들 염려 없이 새롭게 어떤 것을 규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점이 학문을 또한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나는 학문을 할 때 이런 대목에서 학술 용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곤 한답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서요.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학문하기가 더 수월해집니다. 다시 정의로 돌아가 보죠. 학문은 정의에서 시작하여 정의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정의가 중요해요. 비록 그 정의가 나중에 수정되고 바뀔지라도 일단은 부실하게라도 어떻게든 정의하는 게 필요합니다. 학문에서 이론이란 정의들의 체계라고도 할 수 있어요.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면서도 매우 흥미진진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뭔가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는 건 정말 가슴 뛰는 일입니다. 이미 있는 것의 정의를 새롭게 바꾸거나 아니면 아예 새롭게 등장한 그 무엇을 처음 정의하는 거 말이에요. 정말 멋진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 흥분을 감추기 어렵네요. 그러나 이만 진정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죠. 학생 수고 많았습니다. 박수 한번 우리 같이 보내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