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보이는’ 커리어와 ‘나다운’ 커리어 사이

3화 - 삶은 고구마

by 해담
외부 평가 대신 나다움을 선택하기까지,
고민 많은 9년 차 마케터의 솔직한 회고.

여전히 일은 어렵고 매 순간 헷갈립니다.
정답은 없으니 그저 기록할 뿐입니다.

고구마는 비교와 불안 속에서 자라,
나다움과 온기로 천천히 익어가는 중입니다.

오늘도 나답게 살고 싶은 당신에게 전합니다.
"그러니, 고구마 사세요"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 커리어인데 정작 그 안에 있는 나는 영 괜찮지 않을 때가 있다.


포털에 회사 이름을 검색하면 상단에 나오는 규모, 부모님께 설명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인지도, 링크드인 헤드라인에 걸어두기에도 꽤 근사해 보이는 직함, “어디 다녀요?”라는 질문에 회사명만 대답해도 상대의 표정이 살짝 달라지는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괜찮아 보이는 커리어를 만들어준다. 문제는 그 괜찮음 속에 나다움은 얼마나 들어 있는 걸까.


우리는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경력 단절이 불안하고, 공고를 볼 때마다 ‘내가 살아남을 스펙은 되나?’부터 계산한다.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떤가. 지금의 나는 괜찮아 보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까, 나다워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까. 예전에는 9:1로 괜찮아 보이는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면 지금은 6:4 혹은 4:6 쪽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볼 수 있지 않을까.



9년간의 커리어 로드

첫 회사는 도전적인 환경이었고, 회사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받는 사원이었다. 주체적으로 일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분명 있었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었다. 문서나 기획 업무 외에도 육체적으로 소모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이 일을 2년, 3년 더 계속할 수 있을까?’라고 떠올렸을 때, 마음은 시원하게 ‘그렇다’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 시장은 디지털 마케팅, 퍼포먼스 마케팅 포지션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광고를 집행하고, 데이터를 보고, 성과를 만드는 영역이 커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흐름에 올라타야겠다는 직감이 왔다. 그렇게 중소 규모의 디지털 대행사 퍼포먼스 마케터로 입사하게 되었고, 그때부터가 내 커리어 로드맵의 시작이었다.


대행사에서 보낸 4년은 내 취향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정말 여러 산업의 계정을 다뤘다. 교육, 뷰티, 앱 서비스, 이커머스, B2B, B2C… 각기 다른 도메인과 비즈니스 구조 속에 놓이다 보니 조금씩 기준이 생겼다.


어떤 업종은 광고를 열심히 집행해도 재밌지 않았다. 반대로 어떤 브랜드는 숫자만 봐도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문제를 정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이 차이를 계속 기록하고, 정리하다 보니 조금씩 나만의 패턴이 보였다. 데이터를 보고, 퍼널을 그리고, 캠페인을 기획하면서, 성과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데에 마음이 갔다.


그때부터 회사 대시보드뿐 아니라 내 커리어 대시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저 퍼널이 존재할 것, 식품, 건강, 헬스 등 관심 카테고리일 것, 도메인이 명확할 것, 이벤트나 프로모션 등 캠페인 기획이 가능한 곳일 것,,. 그렇게 정의 내린 포지션은 ‘그로스 마케터’였다.


물론 생각한다고 해서 바로 이상적인 회사로 점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식품 인하우스 마케터로 바로 가기엔 내 경력과 연차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몇 번의 탈락 끝에 방향을 완전히 틀기보단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맞닿아 있던 콘텐츠 플랫폼 회사로 옮기게 됐다. 온오프라인 캠페인, 대규모 프로모션, 앱 내 유저 퍼널 개선 등 브랜드 메시지를 풀어내는 여러 실험들을 경험했다. 그 시기는 ‘하고 싶은 일’과 ‘괜찮아 보이는 타이틀’이 6:4 정도로 섞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냉정했다. 수차례 조직 개편 끝에 마케팅팀이 사라졌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갑상선암을 진단받았다. 일에 대한 욕심, 몇 차례의 번아웃,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던 습관이 스트레스성으로 드러난 듯했다. 수술 후 약 3개월의 공백기를 가지며 조금은 일과 개인의 삶이 분리된, 여유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선택은 나스닥에 상장된 글로벌 마케팅 대행사였다. 해외 마케팅 경험을 쌓고 싶었고, K-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도 커지던 시기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글로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두는 건 분명히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있었다.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비즈니스 규모와 스킬 레벨업을 동시에 노린 선택이었다.

하지만 또 예기치 못한 변수가 찾아왔다. 상사 두 분의 퇴사와 부서의 통폐합. 함께 가자는 오퍼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1년 이상을 보내며 나다움을 더 분명히 확인했다. 나는 성장이 있는 곳에서 주도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풀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나에게 중요한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어떤 산업의, 어떤 서비스를, 어떤 구조 안에서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인가. 대답은 중견 기업의 신규 비즈니스 모델로 론칭된 로컬 커머스·배달 앱 서비스였다. 내가 원래부터 좋아하던 식품·건강·생활에 가깝고, 내가 잘하는 앱 서비스·퍼널 기반 그로스 마케팅을 제대로 써볼 수 있는 곳. 여기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따뜻함, 상생이라는 가치까지 담겨 있었다. 자금 구조도 탄탄했고, 비즈니스 임팩트와 성장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꽤 오래 머물면서 같이 성장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고, 괜찮아 보이는 커리어와 나다운 커리어의 비율이 처음으로 적당히 맞아떨어진 느낌이었다. 물론 결과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투자 방향이 바뀌며 서비스는 종료 수순을 밟게 되었다. 다만 이 경험마저도 나에게 기준 하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앱 서비스에서 명확한 문제를 정의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풀어가는 사람. 특히 식품이나 건강과 같은 도메인에서 사람들의 일상에 닿는 서비스를 키우고 싶은 사람. 그렇게 스스로를 데이터 드리븐 풀퍼널 마케터라고 정의 내렸다.



이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값

정리해 보면, 나는 9년 동안 다섯 번의 이직을 하면서 환경과 연봉도 조금씩 올려왔다. 동시에 그만큼이나 중요하게 본 값들은 개인의 에너지, 성장, 임팩트, 관계였다. 이 경험들이 내가 그리는 방향성과 맞춰 쌓이고 있는지, 앞으로 나를 움직이는 방향키가 되어 주고 있는지, 그게 더 중요했다.


이직을 선택할 때 무작정 브랜드 인지도나 대기업이라는 타이틀, 높은 연봉 같은 항목만 보지 않으려 한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은 중요하다. 다만 거기에 조금 더 얹는다. 내가 잘하는 것, 지금 부족한 것, 앞으로 디벨롭해야 할 역량을 계속 팔로업하고 업데이트할 수 있는 일.


특히 마케터라면, 데이터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치는 앞으로 더 크게 갈릴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향후 레벨이 올라갈수록 어떠한 포지션에 놓이고 싶은지, 리더와 팔로워 중 어떠한 성향인지, 어떤 흐름을 타고 움직이고 싶은 지, 지난 1~2년 간 나는 얼마나 성장했고, 부족한 지점들은 무엇인지, 숫자와 문장으로 남겨보는 것이다.



괜찮음 속 커리어와 나

우리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일을 하면서 보낸다. 직장, 프로젝트, 사업, 프리랜서 업무를 포함해서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단순히 버티는 곳으로 두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길고도 짧다. 연봉을 높여가는 것도, 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가치로 일하는 사람인지’를 모른 채 움직이면 언젠가는 방향을 잃게 된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하고, 계속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는 건 본인을 잃지 않는 사람, 자기 색깔이 또렷한 사람일수록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많은 시련과 예상치 못한 난관, 크고 작은 이슈들 속에 놓여 살아가지만, 나는 내 커리어 로드가 꽤 재밌다. 다양한 도메인, 중소기업부터 대기업, 온오프라인 마케팅, 퍼포먼스와 브랜드까지 모든 경험을 할 수 있어 마케터인 나에게 오히려 이러한 시간들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 물론 시간이 쌓이고, 나이도 올라갈 수록 더 단단하고 안정적인 상황을 찾아야 한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 인지도와 연봉의 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나라는 브랜드의 방향성과 가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괜찮아 보이는 커리어와 나다운 커리어 사이,

우리는 아마도 그 사이의 비율을 계속 조정해 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일하는 나를 통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조금씩 더 선명하게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나다운 커리어를 위해, 나답게 살기 위해.

오늘의 데이터.
나의 에너지, 성장, 임팩트, 관계의 방향성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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