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삶은 고구마
외부 평가 대신 나다움을 선택하기까지,
고민 많은 9년 차 마케터의 솔직한 회고.
여전히 일은 어렵고 매 순간 헷갈립니다.
정답은 없으니 그저 기록합니다.
고구마는 비교와 불안 속에서 자라나
나다움과 온기로 천천히 익어가는 중입니다.
오늘도 나답게 살고 싶은 당신에게 전합니다.
"그러니, 고구마 사세요"
커리어에서 우리는 언제부터 시니어인 걸까.
숫자를 기준으로 정하면 편하다. 7년 차부터, 팀 리드가 되면, 연봉이 얼마를 넘기면. 그런데 9년 차가 된 지금도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선이 또렷하게 그어지지는 않는다. “저는 시니어 마케터입니다.”라고 말하면 뭔가를 단정 짓는 느낌이다.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단순한 숫자보단 관점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주니어와 시니어의 선은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지며 일하는가, 무엇까지 책임지려고 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옮겨지는 유연함 같은 것이라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2년 차였을 때, 사수사 상사, 대표님들은 모르는 게 거의 없고 바로바로 답을 내놓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캠페인 세팅도 잘 알고, 매체 구조도 다 꿰고 있고, 대시보드를 켜면 어디부터 뭘 봐야 하는지 막힘 없이 설명하는 사람. 내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시니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나에게도 팀원이 생기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입장이 되면서 조금씩 깨닫는다. 시니어는 아는 것을 말해주기보단 어디서부터 찾아가야 할지, 이 문제를 어떤 구조로 봐야 할지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신입 시절의 내 질문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이 타겟팅이 맞나요?”
“이 카피로 가도 될까요?”
“이 정도 수치면 잘 나온 건가요?”
질문의 중심에는 늘 정답이 있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답이 있다고 생각했고, 최대한 빨리 도달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꾸만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사고했다. 괜찮은지 타인의 시선으로 증명받고도 싶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내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팀에게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지금 이 캠페인의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전략이 브랜드의 방향성과 사람들의 삶, 둘 다에게 의미가 있는가?”
“이 선택은 단기 지표뿐 아니라 서비스의 장기적 관점에서도 도움이 될까?”
보고서나 이력서를 쓸 때도 예전에는 ‘나’에게 포커스 된 표현을 고르려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와 함께, 혹은 과정에 대한 문장을 자주 쓴다. 이러한 관점은 데이터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전체 퍼널을 보다 보면 혼자만 잘해서 만들 수 있는 숫자는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개발자와 디자이너, 운영과 CS까지, 수많은 손들이 스쳐간 끝에야 그래프가 한 칸 올라간다.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나는 이 흐름 안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남기는 사람인가.
커리어 레벨이란 건 어딘가 연차표에 그어져 있는 단단한 선이라기 보단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니어와 시니어 사이, 그 어딘가에 자연스레 놓이는 게 아닐까. 평가받는 나를 중심에 두던 질문에서 방향을 잡는 우리를 향한 질문으로 옮겨 가는 시점. 나는 그 지점에 선이 놓여 있다고 믿는다.
시니어는 책임과 온기가 더해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회의에서 던진 한 마디, 슬랙에 남긴 피드백 한 줄, 누군가의 성장 곡선을 살짝 위로 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하는 레벨. 내 커리어를 세우는 동시에 누군가의 커리어에 작은 발판이 되어야 하는 시기임을 알기에, 선 위의 발걸음도 쉽게 내딛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선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생겼던 선이 사라지기도 한다. 어느 날은 팀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깔끔한 정리를 할 때면 ‘조금 시니어 같네’ 하며 스스로가 대견스럽다가도, 새로운 채널을 만지다 헤매기도 하고, 데이터를 잘못 해석했다는 걸 알고 뒤늦게 수습하는 날이면 여전히 채워나가야 할 빈틈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움직임들이 두렵거나 불안하진 않다. 여전히 ‘어떻게’를 고민하며 그 위에 ‘왜’와 ‘어디까지’라는 레이어를 그저 더 얹을 뿐이다.
주니어와 시니어 사이, 선은 정확히 어디에 있을까. 아마 평생 또렷하게 그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너는 시니어야.”라고 도장이 찍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날들, 숫자를 보고 한 발 더 나아가려 했던 순간들, 결과 지표를 포함해 팀의 경험을 함께 떠올렸던 회의들, 이 모든 것들이 쌓여서 그래프 위에 서서히 다른 기울기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조금씩 나다운 방식의 시니어로 움직이는 중이다.
정답을 찾던 질문이 기준을 세우는 질문으로,
보고서를 만드는 손이 방향을 제안하는 손으로,
혼자 잘하는 사람에서 함께 잘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우리가 그려가는 퍼널 위
그 변화가 당신의 진짜 선일 테니까.
오늘의 데이터.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는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