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의 오락가락 독서일기/능소화,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조두진
조두진 작가의 ‘도모유키’를 읽게 된 것은 이 소설이 2005년 제 10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난 직후였다. 언제나 한국인의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접하고 해석해왔던 내게 이 소설은 무척이나 색 다른 경험이었고, 충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따라 정유재란(1597~1598)에 참전했던 일본군 하급무사 ‘도모유키’의 참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당시 침략을 당한 조선과 침략을 한 일본군의 참상을 짧은 문장으로 냉혹하고 간결(김훈 문장의 압축된 간결함과 비슷한듯 하면서도 어딘가는 또 다른 간결함이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전쟁의 처참하고 참혹한 현실이 나를 불편하게 했고, 전쟁 속에서도 피어난 일본군과 조선 여인의 비극적 사랑은 나를 아프게 했다.
조두진 작가의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1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어느 날 서점에서 그의 새 소설 ‘능소화,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를 보고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2006년 9월 20 예담 刊. 책 내지에 볼펜으로 적어놓은 기록을 보니 2006년 10월 12일 교보문고에서 샀다고 되어있다.) 책에 대한 기사나 광고를 보고 샀는지, 아니면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 눈에 띄어서 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때 나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서점에 들러 한꺼번에 몇 권의 책들을 구입하곤 했는데, 주로 신문의 책 소개를 메모해 두었다가 서점에 가게 되면 사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책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베트남에서 월간 교민잡지를 만들고 있는 선배로부터 시를 한 편을 써서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매월 한 편의 시와 시작 노트를 써서 보내 달라는 주문이었고, 원고료는 없다고 했다. 대신 베트남에 오게 되면 맛있는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이것이 선배가 내게 주겠다는 원고료였다. 앞으로 베트남 갈 일이 한번쯤이야 없겠는가. 그때 능소화가 피고 있었다. 능소화는 외곽순환도로 방음벽을 타고 피어올랐고, 고목을 감싸며 붉게 피어오르는 능소화를 한적한 어느 음식점 마당 앞에서 볼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산길을 걷다가 능소화와 갑자기 마주치기도 했다. 곳곳에서 능소화가 내 눈을 어지럽혔다. 선배가 부탁한 시를 쓴 것도 그때쯤이었다. 오래전 읽어 가물한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은 금방 읽혔다.
1998년 4월 분묘이장을 하던 안동의 무덤에서 한 남자의 미라와 ‘원이 엄마의 편지’라는 연서戀書 한 통이 발견됐다. 소설의 작가 조두진은 이 편지를 모티브로 조선시대 애절하고 슬픈 사랑을 담은 소설 ‘능소화, 4백 년 전에 부친 편지’를 썼다. 내가 능소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소설을 읽고 난 후부터였다. “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는 붉고 큰 꽃망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산짐승과 들짐승들이 당신 눈을 가리더라도 금방 눈에 띌 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 집 담 너머에 핀 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인 줄 알아주세요. 우리는 만났고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4백 년 전 원이 엄마가 먼저 간 남편(이응태. 1556~1586)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에는 병술년 유월 초하루 이 편지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의 병술년은 1586년이고, 이응태는 이 해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6년 전이다.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 무엇이 원이 엄마의 사랑을 이토록 절절하게 했을까? 사람마다 호오好惡가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해 한번쯤 조선시대의 사랑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능히 하늘을 이기는 꽃 능소화,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이다. 질 때는 시들지도 않은 꽃이 절명絶命하듯 떨어진다. 동백을 닮았다.
능소화 -김무균
꽃이 예쁜 건
질 것을 알기 때문이고
사랑이 아름다운 건
이별할 걸 알기 때문이다.
꽃은 함께 피어서
더욱 예쁘고
사랑은 멀리 있어
더욱 그리운데
이젠 다시 너를 볼 수 없어
담장 위 붉게 핀
능소화 바라보다
그 꽃잎 우려내어
너를 안듯 마셨다.
#뱀다리
중국이 원산지인 능소화凌霄花는 덩굴식물이다. 금등화金藤花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의 모양은 나팔꽃과 비슷하고, 색은 홍황색이다. 꽃이 피는 시기는 식물도감에는 8~9월로 되어있지만 6월 말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능소화가 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꽃은 한번 피기 시작하면 초가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예전에는 행세깨나 하는 양반집에서만 키웠다고 해서 ‘양반꽃’으로도 불렀다. 꽃은 이름만큼이나 기품이 있고, 운치가 있다.역시 금등화보다는 능소화라는 이름이 훨씬 어울린다. 꽃은 말려 약재로도 사용하는데 주로 달여서 먹는다. 어혈을 풀고, 이뇨작용을 돕고, 부인병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