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나의 입은 늘 거즈 같은 것이 물려 있었고, 입고 있는 상의는 피로 가득했다. 늘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고, 물을 주지 않는 간호사 쌤에게 떼를 쓰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나의 뇌전증 증세는 심각한 것 같았다. 나의 기억엔 없다. 발작증세는 잠자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일어났고, 상황이 종료된 후 중환자실에 들어와서야 내 정신은 돌아왔다. 내가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런 발작 증세가 잦아지던 어느 날, 발작이 일어나고 있는 중간에 기억이 잠깐 돌아온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주 흐릿하지만 그때 가족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아주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잠시 정신이 깨어났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동생과 아빠가 나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있었고, 엄마는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깨어났을 때 상의의 피범벅, 그리고 입 안에 들어있던 무언가, 내가 발작을 일으키며 혀를 깨물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얼마나 씨게 깨물었으면, 상의가 피범벅이 될 정도로 깨물었을까. 내 기억엔 없지만 깨어난 후 입안의 얼얼함은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될 것 같았다.
그 발작은 예고편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 두통을 느낀다던가 어지러움을 느낀다던가, 내 기억엔 그 어떤 예고편도 없이 나에게 왔다. 예고편 없이 눈 뜨면 중환자실이었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낀 건, 생활하는 중에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단 것이다. 늘 밤에 자면서 나타났기 때문에 학교 생활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중 2,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수학여행 시기가 왔다.
친해진 친구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수학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그 사이에 끼여 재미있겠다며 같이 수다 떨고 있었을 터. 친구들과 며칠, 타 지역에 가서 같이 놀고 온다는 생각이 나를 아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엄마가 반대했다.
수학여행 가지 말자고 설득했다.
학교에 갔다.
담임쌤이 교무실로 부르신다.
담탱이(당시 담임 쌤을 부르던 호칭) 쌤 조차도 수학여행 안 가는 게 좋겠다며 나를 설득하셨다.
엄마 아빠한테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우리를 친구처럼 챙겨주고 놀아주던 이모가 왔다.
이모도 수학여행 가지 말라고 한다.
점점 침울한 기색을 표하는 나를 위해 이모가,
“미니야, 그날 이모랑 놀러 가자. 놀이동산 갈래?”
가족들과 담임 쌤이 왜 이토록 가지 말라고 말리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래도 가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의 이런 상황이 친구들한테 소문이 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쌤의 의견에 동의했다. 수학여행 안 간다는 내 말에, 친구들이 아쉬움을 표현했다.
“왜? 같이 가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친구들, 그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지.
친구들이 경주로 떠난 그날. 나는 엄마와 동생, 이모와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나름 놀이동산이 재미있어서였을까. 친구들과 수학여행 못 간 게 마음에 한이 남거나 하지 않았다. 그날의 나의 추억은 가족들과 놀이동산에서 찍은 사진 몇 장과 함께 남게 되었다.
그 뒤로도 간간히 나의 발작은 지속됐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받아온 그 약을 먹지 않았다. 약 먹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약 먹어야 되는 걸 까먹어일 수도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절대 빼먹어서는 안 된다는 의사 쌤의 말에 받아오고 2번? 이틀? 먹었을까. 그 뒤로 약을 먹은 기억이 없다. 한 뭉탱이 모여있던 약을 버린 기억만 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발작증세는 아주 심했다. 혀를 깨물어 피가 철철 흐를 정도였고, 발작 중간에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에도 온 가족이 내 몸을 붙잡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는 현실, 맛있는 반찬이라곤 볼 수도 없던 도시락, 밤만 되면 자고 있는 나의 손가락을 찌르는 엄마 그리고 밤마다 대성통곡을 하며 골목을 뛰고 있는 내 자신. 이 모든 게 그냥 싫을 뿐이었다. 가족의 힘듦, 아픔, 그런 게 내 눈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나의 스트레스는 극도로 치솟기 시작했고, 그 사춘기 시절 어마 무시한 환난을 풀 상대가 엄마뿐이었다. 내 일기장은 엄마의 욕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다 엄마 때문이라며 탓하고 싶었다. 내 일기장은 날이 갈수록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더 더 심한 욕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