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리듬으로
전날 퇴근길, 아주 오랜만에 옛 상사와 마주쳤다. 스치듯 반가운 인사만 나눴는데, 다음 날 후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점심 괜찮으세요?”
전날의 짧은 인사가 약속으로 이어진 듯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엇갈릴 것만 같아 망설임 없이 응했다.
점심시간, 상사와 후배, 그리고 나. 오랜만에 마주 앉은 얼굴들 앞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상사분은 우리를 고급 소고기집으로 데려가 주셨다. 따뜻하게 대접받는 자리라 그런지 대화도 자연스럽게 흘렀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하니 이야기는 더 깊어졌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 “아이 키우는 건 어때?”
그 질문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러다 결국 말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아이 혼자 키우고 있어요.”
“왜? 아이 혼자?”
그 물음 앞에서 오래 미뤄 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저… 이혼했어요.”
오랫동안 묻어 둔 단어를 꺼내는 데는 아주 짧은 용기가 필요했다. 말이 떨어지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나는 전부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필요한 만큼- 외도와 폭력이 있었고, 그 일이 이혼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오늘의 자리는 상처를 해부하는 테이블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건네는 식탁이었으니까.
잠시 고요가 흘렀다. 상사분이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안전하게 이혼한 게,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네.”
그 말은 나를 탓하지 않는 문장이었다. 내 편에 서서, 오래 잠가 둔 마음 위에 조용히 손을 얹어 주었다.
남들은 승진을 하고, 리더가 되고, 자산을 불리고, 더 큰 무대로 나아간다. 그 속도 앞에서 나는 여러 번 뒤처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마음을 털어놓자, 상사분이 말했다.
“아들이 있잖아.”
그 한마디 덕분에 나는 내 편에서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었다. “맞아, 나는 아들을 이만큼 잘 키워 왔지.”
오늘의 자리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자리였다. 평가도 조언도 서두르지 않는 조용한 경청. 그 한 끼 덕분에 나는 비교의 자리에서 잠시 내려와, 아이를 키우는 내 일상을 조금 더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 속도를 미워하지 않고, “지금의 나도 충분하다”는 말이 마음속에서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울렸다.
사실 나는 회사에서 이혼 이야기를 오래 말하지 않았다. 처음엔 말할 여력도 없었고, 나중에는 사생활을 소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성과가 사생활에 가려지길 원치 않았고, 덜 아문 상처를 더 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혼자 버텼다.
나는 때때로 초조하다. 마음은 가끔 나만의 속도를 잊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곤 한다. 그럼에도 오늘, 솔직한 대화 끝에 작은 안도감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경계와 진심이 함께 설 수 있다는 사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붙들어 온 침묵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인.
앞으로도 나는 다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걸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루하루 감정을 기록하고 흘려보내며, 내 안을 단단히 세우고 싶다.
매일 한 걸음씩 천천히 가는 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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