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의 목록 대신, 평화의 방향
어젯밤, 인생 목표를 다시 적었다. 자산, 일, 글, 아이.
내 삶을 묶어 주는 네 가닥의 끈. 펜끝이 멈췄다. 이게 진짜 행복일까. 불안할 때마다 단·중·장기 이정표를 세워 마음을 달래 왔지만 문득, 물었다. 목표를 모두 통과하면 편안해질까, 아니면 조건이 흩어져도 무너지지 않는 중심을 먼저 배워야 할까.
아침 버스 창문이 미세하게 떨린다. 머릿속은 금세 할 일들로 가득 찬다. 아이의 숙제와 학원, 오늘의 업무, 못 쓴 연재 원고. 예전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도 다 해내야만 괜찮은 사람.
오늘은 다르게 중얼거린다. 해결보다 관찰, 달리기보다 멈춤.
이 한 줄을 마음에 붙여 두자, 목록은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제자리를 찾는다.
낮의 나는 일한다. 결과를 쌓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처럼.
문장 하나, 동료와 주고받은 짧은 인사가 성과의 증거가 아니라 지금을 사는 방식이 된다. 속도를 높여 앞당기기보다 차근차근 하나씩. 점심쯤 휴대폰을 내려두고 눈을 감는다. 상사의 압박과 밀려오는 일들에 흔들릴 수 있었지만 계속 되뇐다. 지금 여기서 하나씩 하면 돼. 전속력으로 달려 모두 다 할 필요는 없어. 침착하자.
오늘의 마음은 맑음과 흐림이 번갈아 오는 하늘 같다. 억지로 맑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쉬게 두는 연습을 한다.
오후에 아이와 통화한다. “오늘 어땠어? 학교, 학원 잘 갔다 왔어?”
예전의 나는 계획과 잔소리로 사랑을 증명하려 했다. 오늘의 나는 속도를 낮춰 사랑을 남긴다. 빠르게 다그치지 않고, 존재가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은 마음. 우리는 많은 순간 그 사실을 잊고 산다.
저녁, 늦은 귀가. 나는 지쳐 있고, 아이는 어제와 달리 씻고 밥을 먹었다. 힘겹다고 느낀 찰나, 대화를 먼저 건다.
“보기 좋다. 잘했어. 시간이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했다는 게 더 중요해. 다음엔 조금만 앞당겨 보자. 잘했다.”
아이도 끄덕이며 뿌듯한 얼굴로 다음을 약속한다. 아이가 잠들고, 나는 샤워를 하고 밤을 맞이한다. 다시 깨어 초안을 다듬어 올릴 수도 있었지만, 내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올리는 편이 독자에게도 나에게도 낫다고 생각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편안히 잠을 청한다.
다시 아침.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정표는 여전히 존재하고 필요하지만, 그 위에 이대로 충분함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어제보다 또렷하다.
숫자와 성취는 조건, 평화는 기준. 지도가 방향을 알려 주지만, 결국 길을 내는 건 내 발의 리듬이다. 나는 묻는다. 지금의 걸음이 내 기준을 지키고 있는가. 흔들려도, ‘이대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자주 흔들린다. 그럼에도 오늘 배운 것을 믿는다.
멈추기, 관찰하기, 허락하기,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이 작은 선택들이 내일의 습관이 되면, 내 서사는 성취의 목록이 아니라 평화의 방향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대신 나와 우리의 하루에 선한 사람. 거기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작가의 말] 여행 후, 다시 저를 다듬고 매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해, 새로운 리듬으로 글을 이어가려 합니다.〈나답게 2〉는 월·수·금,〈아들의 바르셀로나, 엄마의 로마〉는 매주 일요일에 만나요.
늘 마음을 담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