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순서, 연결의 기술
오늘 아이가 내 번호를 막았다. 그보다 먼저, 나는 아이의 전화를 잠시 막았다. 서로 제 마음을 지키겠다며 문을 닫아 버린 셈이었다. 회사 책상 위로 같은 내용의 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게임 시간을 조금만 더 열어줄 수 있어?” 한 번 열어두면 내내 거기에 머무는 걸 아니까, 나는 “업무 중엔 안 돼. 계속 전화하면 차단할 거야”라고 말했다. 버튼을 누르는 감각이 손끝을 지나 팔까지 번졌다. 잠시 뒤 내 전화도 막혀 있었다. 하나의 버튼으로 관계가 닫히는 기분이 가슴을 쿵 하고 내려앉게 했다. 나는 업무를 마무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길 버스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하자 부엌으로 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현관에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엄마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너는 네가 할 일을 스스로 해 줘.” 여름밤은 아직 뜨거웠고, 저녁 냄새와 오래된 먼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한데 섞였다. 밥을 하기 전에, 오늘 나는 나를 먼저 데려가야 했다.
골목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저기까지만’을 정해 잠깐 뛰었다가 다시 걸었다. 발바닥의 아치를 천천히 굴리며 말 대신 호흡을 골랐다. 그 쉬운 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았는지 바람이 조용히 가르쳐 주었다. 스무 분쯤 지나 현관 앞에 섰다. 문을 열며 최소한의 말만 남겼다. “밥은 네가 데워 먹자.” 아이는 씻지 않은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잔소리 대신 짧게 전했다. “엄마는 네가 엄마 전화를 차단해서 속상해.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오늘은 씻고 가볍게 정리만 하자.”
라벤더 소금을 푼 따뜻한 물이 배꼽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온도계를 넣지 않아도 아는 온기, 거울에 얇게 서리는 김. 화면을 잠깐 보다가 껐다. 물의 온도에 집중하니 긴장이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폭발 대신, 틀. 욕실 문 밖에서 전자레인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가 미리 준비해 둔 밥버거를 데워 먹는 모양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말리며 한 줄을 더 만들었다. 감정은 크고, 행동은 작게. 팔을 스치는 수건의 결 사이로 옅은 멍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오늘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 내가 먼저 나를 만져야 했다. 설명보다 온기, 훈계보다 시간. 물을 충분히 마시고 매트에 누워 목과 허리를 늘렸다. 15초 버티고 10초 쉬고 다시 15초. 이런 사소한 동작들이 오늘의 균형추가 된다는 걸 몸이 먼저 기억해 냈다.
침대에 기대어 열 줄을 썼다. 나는 화가 났고, 서운했고, 무력했고, 조금 슬펐다. 이 감정들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려면 문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 문은 때로 문장이고, 때로 산책이며, 때로 물의 온도다. 내일의 장면을 떠올렸다. 알림을 내리는 손가락, 초승달 모양 ‘방해 금지’ 아이콘이 잠깐 빛나는 휴대폰 화면, “업무가 끝나면 읽을게”라고 미리 저장해 둔 짧은 문장, 숙제를 마친 손이 문고리를 돌리는 속도, 저녁의 약속을 줄이고 서로의 숨을 남기는 연습. 벌이 아니라 경계, 처벌이 아니라 구조. 우리가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감정이 쉬어 갈 안전지대.
마음이 아픈 날, 스스로를 돌본다는 건 남을 고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파도 앞에서 오늘의 배를 가라앉히지 않는 일이다. 내 안의 어린이가 울고 있을 때 어른인 내가 먼저 손을 잡아 주는 일이다. 그런 다음에야 대화가 가능해진다. 사과도, 규칙도, 사랑도.
부엌에서 전자레인지 알람이 짧게 울렸다. 아이는 밥버거와 직접 끓인 냉면을 금세 비웠다. “엄마, 나 다 먹었어.” 오늘은 여기까지, 여기가 안전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아이를 불렀다. 차분히 앉아 우리만의 틀을 상의해 만들었다. 아주 급한 일에만 전화하기, 게임·앱 요청은 업무 시간에 하지 않기, 휴대폰 사용 시간은 숙제와 일정에 맞춰 다시 조정하기. 그리고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차단 대신 1시간 무음으로 감정을 식히기로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인지 잠깐의 여유가 우리에게 그 선을 그을 힘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지키기 위해 문손잡이의 온도를 배웠다. 문은 닫히는 동작으로 끝나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열 수 있도록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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