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사이로 스며든 작은 기적
※이 이야기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감성 소설입니다. Hans Zimmer의 'Time' 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천천히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사무실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모니터 화면 속 커서는 몇 분째 같은 자리에 깜빡이고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입력할 수 없었다. 손끝은 키보드 위에 멈춰 있었고, 어깨는 숨기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처져 있었다.
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인사팀 담당자의 조용한 한마디였다.
“후배가… 본인이 해고 대상인지 확인하러 왔어요.”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억울함이 먼저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마음속에 먼저 떠오른 건 낯선 감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두려운 사람이었나.'
분명 걱정이었다. 조언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내가 자라온 방식이 그랬다. 누군가를 단단히 밀어붙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렇게 버텨온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처럼만 하면 된다. 그 믿음에는 한 번도 의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믿음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도시는 여전히 밝았고, 차들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을까.'
아침 아홉 시 출근, 밤 열한 시 퇴근. 때로는 새벽 두 시. 점심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일을 했고, 회식은 빠지지 않았다.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와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도, 집도 무너질 것 같았다.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아파트 담보 대출, 아이들 학원비, 매달 빠져나가는 생활비. 그 숫자들이 나를 계속 앞으로 밀어냈다. 그래야 한다. 그 말은 어느새 내 신념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오늘 처음으로 그 신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회의실 문 앞에서 윤슬을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서류를 안고 서 있던 그녀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짧은 인사 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 많이 힘들었나 봐요.”
윤슬은 오늘 인사팀에서 나를 부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내 안에 눌러두었던 말이 천천히 올라왔다.
“제가… 후배에게 너무 심하게 말한 걸까요.”
생각보다 말은 쉽게 나왔다. 윤슬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서류를 가슴에 안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한동안 그랬어요. 모든 게 제 책임 같아서요. 내가 안 하면 다 무너질 것 같고… 그런데요, 가끔은요.”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우리가 다 짊어지지 않아도, 세상은 생각보다 잘 돌아가더라고요.”
그 말은 위로도, 조언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말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윤슬이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배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 나 자신에게조차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세게 말해야 했을까.
왜 쉬지 못했을까.
왜 멈추는 게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날 이후, 나는 말을 줄였다. 채찍질 대신 질문을 던졌고,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엔 어색했다. 팀이 흔들릴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배들은 오히려 더 자주 말을 꺼냈고, 표정이 밝아졌다. 일은 더 정돈되었고, 회의는 길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내가 세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현관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안에서는 가족의 숨소리만 조용히 들려왔다. 그 고요함이 낯설었다. 그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날은 완벽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쉬는 법을 몰랐고, 내일도 다시 출근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분명했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내 삶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아주 작고 조용한 기적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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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로드에서 읽기 : https://short.millie.co.kr/jn8wt1
* 함께 읽으면 좋은 윤슬의 지난 이야기 : https://brunch.co.kr/@@d4Ax/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