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
※ 이 이야기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감성 소설입니다.
Olafur Arnalds의 'Tomorrow's Song'을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고 천천히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주희는 학교 앞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대를 가만히 쥐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손끝으로 조용히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아침부터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약속이 오늘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차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 오늘 오후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지난밤 받은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주희는 눈을 감았다.
사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수빈이 아니라 주희 자신이었다. 완벽한 엄마, 성실한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춰진 불안을 선생님에게마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손이 무거웠다.
“들어오세요.”
담임선생님은 차분한 미소로 주희를 맞았다. 수빈의 성적이나 태도 같은 객관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상담은 차츰 무거운 침묵으로 번졌다.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꺼냈다.
“수빈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어 보여요. 저희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도 한번 대화를 나눠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내 먹먹했다. 자신의 모습이 수빈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그녀는 늘 완벽을 추구했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런 모습을 수빈이 그대로 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수빈은 자신의 방에서 문을 살짝 열고 주희를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말없이 다시 방문을 닫았다.
주희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수빈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무수히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그녀는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수빈아, 잠깐 들어가도 될까?”
짧은 침묵 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
수빈의 방은 정돈된 책상과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빈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척했지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노트 위로 그녀의 손끝만 맴돌고 있었다. 주희는 옆에 놓인 작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랑 잠깐 이야기했어. 그냥… 네가 요즘 어떤지 궁금해서.”
수빈은 눈을 내리고 있었다. 손끝의 작은 떨림을 주희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희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목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수빈을 위로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채 오랜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평범한 일상 속의 소리들이 수빈의 방 안에서는 더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수빈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책상 위만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는 그냥… 아무것도 잘못하면 안 될 것 같고, 조금만 틀려도 다 망할 것 같아.”
수빈의 말은 차분했지만 깊은 불안이 담겨 있었다. 주희는 그녀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두려움을 보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되뇌었던 말들이 수빈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닐 텐데… 내가 너무 그렇게 살아서 너도 그렇게 된 건 아닐까 걱정돼.”
주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수빈의 어깨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딸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수빈아, 나도 네 나이 때 똑같았어. 잘못하면 안 된다고, 완벽해야 한다고. 근데 그렇게 살다 보니까… 나중에는 더 힘들어지더라.”
수빈은 조용히 주희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의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꼭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지금 네 모습 그대로 괜찮아. 그걸 엄마가 말해주고 싶었어.”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그러나 아직 서로의 마음이 완전히 닿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작은 대화를 시작으로,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갈 시간이 필요했다. 한 번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오늘 이 순간만으로도 둘에게는 아주 큰 시작이었다.
잠시 후 수빈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 생각보다 많이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주희는 작은 미소로 답했다.
어쩌면 수빈이 그녀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더는 자신의 두려움을 딸에게 투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수빈은 다시 책상에 앉았고, 주희는 방을 나와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 불빛이 천천히 거리를 밝혔다. 주희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작은 대화는 자신에게도 아주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한꺼번에 서로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천천히 서로의 마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희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창가로 비치는 밤의 고요한 빛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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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날의 기적〉 최종화를 앞두고, 이야기를 닮은 짧은 예고편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