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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Oct 17. 2021

가볍지만 강한 글을 위하여

브런치 글을 쓰면서

나는  피천득 작가의 글을 14살 때 처음 읽었다. 독서감상문 경연대회 당일에 학교에서 틀어준 추모 영상을 보면서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처음 알게 됐다. 처음 생각은 "글이 참 짧다"였다. 필독 책은 아니었지만, 술술 읽히는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기사 칼럼에서 읽은 유명 작가의 후기는 "피를 토하며 한 장 한 장 써 내려간다"였는데, 왠지 좋은 글은 그래야 하지 않나 싶었다. 나도 그 작가처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소설을 써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히는 줄거리에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간단해 보이는 시를 택했다.


시는 이백과 두보 시절의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그 맛을 보았다. 짧아서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는 한 행 한 행 담는 것이 오래 걸렸다. 어설프게 따라한 어려운 어휘는 빈 항아리를 담은 꾸러미 같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한창 시를 여러 개 썼는데, 작은 상을 받고 나서 힘이 더 들어가서, 사전을 뒤지며 한자와 섞어 길게 썼다. 기억나는 부분 중 하나는 "나그네의 빈상(貧相) 이 처량하기만 하구나"였는데, 과연 내가 그 의미를 알고 썼을까. 국어 선생님은 시를 읽어보시고는 보이는 단어에 치중하지 말고, 유치하더라도 느낀 바를 그대로 쓰라고 하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다.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하기도 했다.

장황하고 멋있게 쓰려한 사춘기의 모습은 미국에서도 바로 벗지 못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밤새 쓴 에세이가 앞에서 반 이상이 빨간 줄로 그어지는 광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이 왜 이 문단을 넣었는지 물어보셨을 때, 솔직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것저것 멋있는 것 같아 갖다 쓴 문장들은 문맥을 흐리고, 어여쁜 색을 지나치게 겹쳐 써 검은색으로 만들어버렸다. 지 필요할 것 같아 방 안에 놔둔 물건들이 필요한 자리를 메꿔버리듯이, 어지러운 내 글에도 정리가 필요했다. 고등학교부터 본격적으로 내려놓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꾸밈없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벌거벗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은연중에 스며 나오는 감정의 두께가 문장 본연의 모습을 덮기도 한다. 글은 은유의 화상이다. 살아온 흔적이 문체에 묻어 나오고, 어찌하여 한 두 문단으로는 실체를 숨길 수 있지만은 결국 드러나는 것이.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읽으면 재미가 약간 가미된 작가의 기억들을 느낄 수 있고,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 읽으면 그의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글의 분위기와 템포가 바뀌어가는 것은 바로 글이 본인이기 때이다.

어렸을 때 집 소파에 놓여있던 이 책이 기억이 난다. 싱아는 정말 맛있을거라 생각했다.

수십만 개의 프레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영화 속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글 또한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이 쌓이면서 그 기억들을 영사기에 넣는 역할을 한다. 가 직접 쓴 글이라 할지라도 다시 읽었을 때 느끼는 약간의 어색함과 향수는 나를 글쓴이가 아닌 읽는 이의 시점으로 바라보게끔 해준다. 그래서인지 미래의 내가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좀 더 객관적으로 지금의 감정을 바라볼 때, 솔직하다고 느낄지 한번 더 생각해본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는 일기도 누군가 읽는다는 심정으로 쓴다고 한다. 나 또한 글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많이 쓴다. 진솔하고 동적인 대화도 좋아하지만, 빠르게 스쳐가는 단어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뜻을 전달하지 못하거나 잘못 전해주는 일이 많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즐겨 쓴다. 내 친구들은 조부모님들도 안 써주시는 담의 편지를 받는다며 웃는다. 말을 할 때 마음이 앞서 이 말 저 말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흘러가는데, 편지는 정적인 대신 생각의 다림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했던 말보다 남긴 글로 더 기억되고 싶은 소망도 있다.

Marcel Proust의 마들렌과 홍차처럼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출처: Pixabay

작가들이 글을 다듬듯이, 복싱 선수들도 체급에 맞게 훈련을 하고 몸무게 조절을 한다. 예전에 복싱의 전설 Muhammad Ali가 핵주먹 Mike Tyson과 함께 한 인터뷰 중 전성기 시절의 두 선수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러자 AliTyson을 가리키며 말했다.

I was a dancer. I wasn't that powerful but I was so fast. If he hit me... but that's if he catches me

한 번에 자신을 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볍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라는 게 내 철학이다. 가벼운 것은 약한 것이 아니다. 무겁고 강한 것은 눈에 띄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가볍고 강한 것이다. 나도 그런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펜을 쥔 힘을 빼고, 마음의 힘을 덜고, 그리고 주변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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