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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Oct 31. 2021

밀레니얼의 20세기 추억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들으며

비가 질척하게 오는 날에는 거리 냄새가 더 물씬 난다. 도시 구석에 있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철저하게 코를 찌를 때, 나는 자동차 경적 소리나 빗소리 위로 다른 이야기를 입힌다. 때로는 팝송을, 가사 없는 재즈를, 또는 유행이 한창 지난 한국 가요를 듣는다. 주하는 나를 그리기도 하고, 그럴듯한 배경을 입혀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무실에 도착한다. 도착하고 나서의 30분은 가라앉히는 시간이다. 붕 떠있던 마음을 다시 차곡차곡 모아서 책상 앞에 정리하는 시간, 그리고 잠시 몽상가의 옷을 걸어두고 다시 양복을 입을 시간. 그렇게 직장인으로서의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나는 아날로그에 가까운 사람이다. 김현식, 김광진, 유재하의 노래를 듣고 겪어보지 않았던 시대의 추억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공황 시대의 재즈를 들으며, 음질 좋은 스피커 대신 오래된 LP 음반을 찾는다. 시를 쓸 때에도 자유롭게 쓰는 것을 멀리하고, 확실한 규격과 운율을 지켜야 하는 소네트를 즐겨 쓴다. 그리고 문자보다는 편지와 전화를 더 선호한다. 화려한 기술이 장식하는 21세기를 역행하는 듯한 나의 모습을 , 친구들이 "7080"이라고 부르는 별명이 과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친구가 선물해준 레코드 플레이어. 바늘을 조정해 골라 들을 수는 있지만, 나는 순서대로 듣는 것이 좋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미국에서는 "Stranger Things"가 인기를 끌었다. 80년대의 유행과 문화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TV 앞에서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드라마 속의 인물들에 이입하는 모습과 세대가 시간여행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양국 모두 자라온 시대를 돌아가고파 하는 것은 공통인 것 같다. 전화와 편지가 전부였던 시절 이웃사촌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에 익숙했던 세대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신세대가 삭막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나 또한 빠른 템포의 현실에 지칠 때면 옛날에는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대가 결코 절대적으로 나았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한국은 80년대부터 부실했던 경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때 심화된 소득불평등 아직도 사회의 큰 문제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것은 불과 90년대의 일다. 베트남 전쟁에서 막 벗어난 미국은 중동에서 시작한 전쟁과 인종 간 갈등으로 인한 문제가 많았다. 오늘날에 새로 생긴 일들도 있지만, 이제 와서야 해소된 문제들도 많다. 지나왔기에 미화되어 보이는 것이다.

한국 "응답하라 1988"과 미국 "Stranger Things" 포스터. 다소 촌스러운 복장의 주인공들이 보인다. 출처: Netflix, CJ E&M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번 다르다. 슬픈 일도 지나고 보면 즐거웠던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시간이 더 지나 다시 슬펐던 기억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복합적으로 얽혀있었던 일들의 순서와 무관하게, 아볼 때의 감정의 두께에 따라 의미를 성급하게 부여한다. 이를 반복하다 보면 점점 무뎌지고, 결국 수렴하는 것은 여운이 있는 낭만적인 억이다. 희미하지만 없어지지 않는 기억을 되짚는 것은 그 자리에 지금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오래된 녹음기 담긴 나의 목소리는 어색하다. 는 이제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 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완벽하게 이전의 나를 기억할 수 없다. 짐작하건대 그때의 나는 그때의 논리와 감정에 충실하게 임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미 지난 일이라는 사실이다.

Midnight in Paris의 한 장면. 21세기의 Gil은 20년대로 돌아가고 싶었고, 20년대의 Adriana는 1890년대를 원했다. 출처: Sony Pictures

Woody Allen 감독의 Midnight in Paris에서는 주인공 Gil이 시간여행을 하며, 동경하던 작가와 화가들과 만난다. 그중 원하는 시대의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 여성은 그처럼 그녀의 시대 이전의 세상을 동경했다. 과거는 꾸며지기 마련이고, 지금은 그때의 좋았던 점만에 젖기 쉽다. 의도치 않게 스민 추억의 냄새는 고개를 돌리게 하고, 지금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찰나의 순간 Orpheus뒤돌아보는 바람에 Eurydice를 잃었던 것처럼, 지나친 과거에 대한 동경을 위해 앞으로의 시간으로 대신 값을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거리는 이어폰 없이 걸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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