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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헌 Nov 17. 2024

12. 무수한 시간대의 퇴적층

열정의 온도12. 시간의 퇴적층에서 만나 보기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죠.

“이상해요. 왜 선생님과 함께 걷는 느낌이 편안하죠?”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며 그녀가 진성을 힐긋 보며 말했다. 진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도발하듯 얼굴을 가까이 내밀며 눈 속을 더듬듯 살펴보았다. 그녀가 하는 행동이 좀 우스꽝스러워서 진성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성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일어났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진성이 그녀를 같이 보며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서로 같이 바라보기 한 것 아니었어요? 지금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이 땅 아래엔 무수한 흙과 먼지들이 쌓인 퇴적층이 있을 거예요. 한 때 따로 떨어져 있다가 이 땅에서 만나 서로 포개거나 섞여있는 것이죠. 우리도 어쩌면 그런 무수한 시간대의 퇴적층에서 만나 서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죠.”     


진성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 많이 웃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과 스쳐 지나갔지만 진성은 냉정에 가까웠다. 열정의 온도가 도무지 잘 올라가지 않았다. 미소를 지을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실없이 웃음이라는 것이 튀어나올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손 내밀어 보세요.”

진성의 생각을 밀치듯 그녀가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성은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가만히 손바닥을 보다가 자신의 작은 손바닥을 그 위에 포개며 말했다.   

“손잡고 가요. 우리 섬으로 놀러 가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죠?”     


진성은 딴전을 피울까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기억해요. 갑자기 증발하지 않았다면 그때 갔을지 모르죠. 아주 오래된 약속 같아요. 그 말의 유통기한이 아직 남아  있을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진성의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진성이 왜 그러냐는 식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말했다.

“손을 괜히 잡았겠어요.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아 있음을 체크한 거잖아요.”

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너무 꽉 잡고 있었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형사가 범인을 도망가지 못하게 서로의 손에 수갑을 채운 듯했다. 또 한편으로는 접착제로 붙여 놓은 듯 서로의 손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두 개의 손은 서로의 지문을 포개고 손금을 합하며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진성은 두 개의 손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육지와 섬까지는 몇 개의 바람이 불고 파도가 굽이칠까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셀 수가 없는 것을 개수로 말하면 어떻게 답하죠?”

“그냥 수 억 개의 바람과 파도가 오간다고 생각하면 되죠.”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처럼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손을 보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 신호는 같이 섬으로 놀러 가실 거라는 거죠?”

진성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 버린 자기의 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손을 잡혀 있어서 거부를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도 그녀와 함께 뭍을 떠나서 섬으로 자신을 유배시키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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