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기 찾아온 번아웃의 벽

첨단 과학적 진단의 한계 1. 그녀의 고통과 두려움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by 백승헌

수진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알람은 정시에 울렸지만 그녀의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무거운 이불 위에 얹힌 눈꺼풀처럼, 그녀의 하루는 늘 무기력과 통증으로 시작되었다.

거실 한쪽, 잿빛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커피포트가 두 번 끓어오르도록 수진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타들어가듯 더부룩했다. 어깨와 목덜미는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허리 아래는 차갑고 공허했다.

“또 밤새 한숨도 못 잤어...”

몇 달째였다. 그녀는 대형 광고회사 팀장으로 필리핀 지사의 주재원으로 와서 무리를 한 듯했다.

밤샘 PT와 야근을 버티던 그녀는 어느 순간 번아웃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몸과 마음이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진단은 늘 똑같았다.

“스트레스성 위염이네요.”

“자율신경 실조일 수도 있고요.”

“과로입니다. 약 드시면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크고 시설좋은 병원의 첨단 과학적 진단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여러 설명은 했지만 병의 원인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딘가 무너져가고 있다는 불안만이 그녀의 내면에서 지진처럼 일어났다.


수진의 컨디션저하를 느낀 친구 지혜가 말했다.

“한의원 한번 가봐. 요즘은 침은 과학이래. 한약도 아주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

“어디를 가야 하는 거니? 여긴 한의원 찾기도 힘들잖아.”

“보니파시오에 있는 맥산 한의원 한번 가봐.”

그녀는 말을 툭 던지듯 했다.

수진은 반쯤 체념한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맥산한의원’이라고 검색했다.

‘자율신경’ ‘통증’ ‘여성 전문’ — 검색창에 나열된 단어들이 보였다.

특별한 느낌 없이 보고 있는 중에 하나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맥산한의원. 강승윤 원장. 침술·한약·정서치유 병행.

그 순간, 이유도 없이 이름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녀는 예약 버튼을 눌렀다.


한의원은 보니파시오의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있었다.

잔디밭이 깔려 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 대형슈퍼 마켓 SNR 옆길에 있었다.

입구에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한국의 한의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현관문 너머로는 은은한 백단향이 퍼지고 있었다.

차분하게 생긴 필리핀인 간호사가 미소로 맞이했다. 그녀는 수진의 예약을 확인한 후에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수진이 자리에 앉자 침향차 한잔을 주며 말했다.

“이 침향차를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실 거예요.”

수진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과연 마음이 안정될까?’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수빈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간호사가 나직이 말했다.

“최수진 님, 원장실로 가세요.”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천천히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남성이 하얀 한의사 가운을 입고 앉아 있었다. 눈빛은 의외로 따뜻했고 태도는 단정했다.

“앉으시죠. 몸 상태부터 천천히 들어볼게요.”

수진은 불면, 통증, 소화불량, 무기력, 우울… 등을 토로했다. 꺼내는 데만 몇 분이 걸릴 정도로 다양한 증상들이었다. 말로 표현하기에도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그 복잡한 증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메모를 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은 의료진의 피상적인 경청이 아니었다. 정말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눈빛이었고 아픈 영혼을 느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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