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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코비드 19 이후 베트남에서의 삶

코비드 19 이후 많은 것이 변했겠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일상

by 백승헌

“코비드 19 이후 베트남은 어떻게 변했나요?”

베트남 진출을 하기 위해 시장조사차 호찌민에 들른 K 씨가 내게 물었다. 코비드 19 전과 후는 분명한 변화가 많을 것이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자세하게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이 대거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정도가 피부로 느껴집니다. 베트남 내부 사정이나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한국인들은 코비드 19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나요?”

“그렇다는 말도 있고 아직은 아니라는 말이 있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베트남 진출을 모색하는 기업이나 개인의 호찌민 방문은 크게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이상의 세밀한 상황을 실제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가 다 그렇겠지만 코비드 19 이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몇 가지의 징후를 제외하고는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다. 몸으로 느끼는 변화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의 수상이 지난 1월에 사임을 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화제로 삼지는 않았다.

내가 베트남사람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에 대한 질문은 좋아하지 않는다. 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국과 달리 베트남은 은밀하고 강력한 통제가 있기 때문이다.

호찌민의 경우, 코비드 19 이후 베트남에서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다. 가끔 친한 한국인 지인을 만나기도 하지만 특별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베트남에 살면 어느 부분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인드를 닮는 것 같다. 여기 사는 한국인들도 정치와 경제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변화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새로 시작이 되고 내일도 오늘과 거의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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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 19의 ‘사회적 격리’와 완전한 봉쇄의 기간

‘사회적 격리’와 봉쇄의 기간은 모든 것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

거리는 통제되어 텅 비어 있었고 유령의 도시와 같았다. 하노이에서 특수부대를 파병했으며 호찌민은 완벽하게 통제 하에 들어갔다. 평생 처음 보는 완벽히 통제된 도시를 경험한 시기였다.

집 밖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고 오직 집안에서만 생활했다. 식료품은 통행허가증이 있는 업체에 주문해서 공급을 받는 정도였다. 이 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끔찍한 재앙이었다. 7군 푸미흥과 달리 2군 타오디엔은 임대료를 비롯한 모든 것이 20% 이상 비쌌다. 한데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나는 그 기간 동안 코로나와 뎅기열에 걸리기도 했다.

코로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지만 뎅기열이 겹쳐 매우 위험했다. 엄청난 고열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려 14일을 침대에 누워서 사경을 헤맸다.

당시 호찌민시는 코로나에 걸리면 강제 입원을 시켜 병원에서 격리를 했다. 한국인들 몇 명은 격리된 병원에서 사망을 했고 병원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 떠돌았다. 실제 사진으로 본 병원의 격리시설은 열악했다. 격리라기보다는 코로나 환자들을 한 곳에 모아둔 것과 같았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바이러스치료제를 연구했었기 때문에 코로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와 뎅기열의 시너지는 강했다. 14일 후 두 바이러스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후유증은 극심했다.

약 한 달 동안 나는 공진단과 폐강화제를 복용해서 후유증에서 벗어났다.


당시 내가 개발했던 바이러스치료제는 매우 효과가 좋았다.

그 이유는 말레이시아에서 오랜 기간 임상과 연구를 통해서 만들어진 치료제였기 때문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열대의 날씨에 건조한 지역적 조건으로 바이러스 천국이다.

온갖 종류의 바이러스가 발생했고 간혹 치명적인 위험성도 있었다. 뎅기열을 비롯해서 감기, 독감, 목감기, 열감기(말레이시아에만 있는 감기) 등이 엄청났다.

나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바이러스 치료제를 만들었다. 효과는 매우 드라마틱했다. 감기약보다 한방 바이러스치료제는 탁월했다. 다양한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강화로 감기의 경우, 하루, 이틀이면 바로 나았다.

그 연구를 오래 했기 때문에 나는 효과적인 바치스(바이러스치료제)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코비드 19는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바치스를 홍보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바치스를 복용하면 이틀에서 3일이면 바이러스가 치료되었다. 하지만 공개적 마케팅을 불가능했다. 대신에 그 효과를 경험한 친한 환자들은 그것으로 바이러스를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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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한인회의 상조위원회 K회장에게 극심한 환자에게는 무료로 바치스를 제공했다.

그는 ‘사회적 격리’ 기간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바치스를 받아서 환자들에게 배달을 했다. 일반인들은 외부출입이 금지되었지만 그는 특별한 통행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코비드 19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내게 말했다.

“마치스가 많은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효과가 좋더군요. 감사드립니다.”

바이러스 연구는 좋았지만 경제적 상황은 힘들었다. 해외생활에서의 무려 1년 2개월을 영업정지를 해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시기였다. 여기저기 폐업이 행렬을 이뤘고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코비드 19 기간 동안 약 80%의 한국인이 귀국했다는 말이 있었다. 호찌민 거주 한국인 인구 대략 15만 추산에서 5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시절이었다. 호찌민에 남아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의 시련이었다.

나는 이주 후 1년 2개월이 지나서 다시 한의원을 오픈했다.


세계 최고 약재의 보고 베트남과 특효제 연구

코비드 19로 ‘사회적 격리와 봉쇄’가 되었을 때 오히려 무척 바빴다.

그 기간에 나는 특효제 연구에 전념했다. 평소에는 도저히 엄두를 못 낼 특효제 만드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약재의 법제와 처방, 조제는 예술이며 과학이다. 때론 연금술처럼 신비한 효력을 보이는 특효제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예술과 과학적 가치 때문이다.

특별히 좋은 특효제는 만드는 기간이 3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나는 기존 물약으로서의 추출적 한계를 극복하는 다양한 특효제를 만들었다. 특별한 약재는 9번을 찌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또 물약으로 60시간 이상 열을 가하여 고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최고의 특효제를 탄생시킨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시간과 몰입의 과정이 필요한 연구이다. 나는 코비드 19 기간 동안 그렇게 하여 많은 특효제를 만들었다. 체질의학적 원리에 따르면 최고의 특효제는 특정 장부의 엔진 보오링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엔진 보오링이란? 자동차의 엔진을 들어서 전체적인 수리를 하는 것을 뜻한다. 자동차는 달리다 보면 피스톤이 마모되고 라이너는 커진다. 또 크랭크축은 마모되어 작아진다. 이는 출고되었을 때의 상태로 되돌려 복원하는 작업을 보오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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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의학으로 보면 인체의 장부도 모두 보오링을 필요로 한다.

자동차는 시동을 끄면 휴식모드가 된다. 하지만 인체는 휴식 모드라는 것이 없다. 잠을 잘 때조차도 심장(엔진)과 폐(라디에이터), 기름통(위장), 엔진필터와 오일(신장), 오일분사기(비장)는 작동을 한다. 당연히 특정 장부의 과부하가 따를 수 있고 보오링이 필요하다. 이렇게 원래보다 못해진 마모된 상태를 복원하는 것을 특효제가 보오링 하는 것이다.

이는 28 체질의학의 원리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체질의 장부를 보오링 한다는 것은 보통의 약재로는 불가능하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최고의 약재가 들어가야만 탁월한 보오링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베트남 약재 사용은 필수적이다. 중국과 한국의 약재도 중요하지만 특수한 약재는 베트남이나 히말라야의 약재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서 베트남 약재를 연구하며 다양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한국이나 중국의 약재만으로 부족한 특효성분을 구할 수 있었다. 베트남 약재의 보충으로 보다 효과적인 특효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비드 19로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호찌민에서 장편소설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한국이나 외국을 구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21세기 디지털 노마드 시대에 국경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구태여 베트남이 외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초록별 여행자로 살고 싶다.

베트남 문화 여행기 시즌 1은 오늘로써 마감하고 내일부터는 <체질과 성공의 관계>에 대한 글을 쓸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베트남 문화 여행기’를 애독해 주신 여러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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