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의 그 무엇... (2021.07.10.토) *
오랜만에 3학년 L양이 찾아왔다. 고맙게도 나를 많이 좋아해주고 따르는 아이인데 이런저런 옛날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중에 한 이야기.. 매일 일기를 쓴다면서 1학년 때 본인이 쓴 일기 내용을 말해준다.
2019년 12월 18일(월) 6교시 음악시간에 ‘할렐루야’ 악보를 가지고 오라고 했나 본데, 아이들이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나..
- 다른 반 같으면 화를 내면서 밖으로 내보냈을텐데, 너희 반은 내가 예뻐하는 반이어서 그런지 아무리 해도 화가 안나네...
아이들은 나의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고, L은 그 내용을 일기장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몇 년 동안, 꽤 오랜 시간, 교무실 바로 옆에 있는 (1-O) 아이들과 잘 맞았고 아이들도 나를 잘 따른다.
아마도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내가 괜찮아서가 아니라, 나의 그 거칠은 천성을 아이들의 예쁨과 그 무엇이 잠재워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변화시킨 것...
내가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 말 안 듣는 동생을 혼내는 방법 중 하나....베개 밟기..
나도 까먹었고 있던 이야기인데, 지금 찾아보니, 이런,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L양이 말한다.
- 제 동생이(지금 1학년 학생) 이 방법이 뭐냐고 계속 물어요..
종례가 끝난 시각에 (놀랍게도) L의 동생이 찾아왔다. 방학 잘 보내시라며 인사를 왔다. 자매가 돌아가며 찾아오니 예쁘다. 동생 L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런데, 말 안 듣는 동생을 혼내는 방법이 뭐예요??
- (크게 웃으며) 베개 밟기...
- 네??? 앗! 더러워!!! 베개 빨아야겠다.
먼저 왔던 3학년 L이 이런 이야기도 했다.
- 선생님, 제 친구들이 선생님 정말 좋아해요..
- 아..진짜??? 정말 고맙네....여자애들에게 찍히면 끝인데....
- 그쵸....여자애들이 무섭기는 하죠...그런데 우리 25기 애들, 선생님 엄청 좋아해요...
- (사실 이 말을 믿지 않는다..그럼에도) 정말...?? 이번 27기 애들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싫어만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좋아하기까지 해 준다면야....설사 그것이 빈말이어도 말이다...
2019년의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두 L양을 번갈아 만나면서, 그 날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아이들은 이렇게 ‘빈 말’이라도 해 줄 줄 안다는 것에 어떤 때는 ‘인격적인 성숙함’ ‘경외심’ 같은 것을 갖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기
- 아이들을 통해서 성숙해지기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하는 적도 있다.
- 아이들은 이런 때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이미 아이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줄 알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멈출 줄도 안다. 그리고 어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기대하고 있다.
나는 사실 그날 하루 내내, ‘검은색을 검다’고 ‘외치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왜 어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마는걸까... 누구나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지만, 본대로 들은대로 생각나는대로 말해서는 안된다고 알고 있는데, 어른들은 이것을 한꺼번에 다 한다. 아니 해 버린다.
- 저것은 검은색이야. (나도 알고 있는데..)
- 그런데 왜 저것은 검은색이지..?? (이유는 너도 알잖아...)
- 검은색이어서 보기 싫어..(우리 모두 느끼고 있거든..)
그런데 또 외친다.
- 저 검은색, 보기 싫어...누가 좀 바꿔봐..(이렇게 외쳐대는 저 입을 틀어막고 싶다)
검은색이어서 보기 싫고 다루기 싫지만, 계속 그것을 검은색이라고 외치고 있으면 어쩌라는 것인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고,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면 좀 기다릴 줄도 알고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본인이 해 보려고 노력이라도 해 보고...
본대로 생각나는대로 ‘툭’ 내뱉지 말고 잠깐 멈추어 생각도 좀 하고 지그시 바라볼 줄도 알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저 거친 말을 좀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2019년의 내 모습을 이야기하는 3학년 L에게 이야기했다.
- 예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나 봐....내가 그랬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세월이 지날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들을 그 세월들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나름 날카롭고 정확한 눈매를 지닌 ‘Young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제대로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고 사리분별 할 줄 알며 지금 이 순간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짓없이 판단할 줄 아는 (17세 ~ 19세)의 아이들이, 나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며, 어이없었던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게 해 주며, 새로운 힘과 용기와 무엇보다 ‘웃음’을 준다는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아이들과 함께 또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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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스승의 날에 받았던 종이 카네이션..
작년 우리 반 J에게서 받은 것인데, J가 이것을 설마 만들었을까 해서 물어보았다.
- J~ 설마, 이거 네가 만들었어??
- 아뇨...동생에게 만들라고 했더니 만들어 줬어요..
- 뭐..?? 여동생??
- 아뇨...남동생이요..
- 아니, 남동생에게 만들라고 하니까, 이걸 순순히 만들어??
- 네.. 이리저리 접더니 만들어 주던데요..
동생에게 이 꽃을 만들라고 한 것도 대단하고, 그런 형의 말을 듣고 애써 만들어 준 남동생도 대단하다..
애들이란...이런 것이다....
어른들의 심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그 어떤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