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상처도 나의 상처처럼,
울퉁불퉁하기만 한 돌덩어리였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알게 된 친구가 있다. 어찌나 있어보이는 모습으로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인지, 투박한 타입인 나와는 좀 안맞겠다 싶어서 적당히 대하는 정도인 그런.
장사를 하는 녀석인데 어느 날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고, 가지는 못했지만 축의금은 보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지인들은 그가 아내를 '트로피와이프' 정도로 여긴다며 수군댔더랬다.
최근, 어떻게 몇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 친구와 재회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변함이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트로피와이프'이야기부터 여성편력으로 똘똘 뭉친 무용담까지. 허세로 시작해서 허세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 능력에 진지하게 책 한번 써보겠냐고 묻고 싶게끔 했다.
식사 후 커피도 마셨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그리고 헤어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로 술을 권했다.
한두 잔 들어갔겠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니가 진작 나한테 술을 샀으면 내가 너 잘 봐줬지"라는 다소 무례한 말을 꺼낸다. 그렇지만 화나지 않았다. 나는 안다. 그의 허세를, 그늘진 바닥을, 그런 안타까움을.
당연한 말이겠지만 진짜로 책 써보겠냐고 제안하려고 술을 권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죄악은 범했다.
오늘 만난 사람들 중 한 사람 빼곤 나 포함해서 너 이혼소송 중인 거 알고 있다고, 위자료 내야해서 씨름중이라는 말도 돌더라는. 다들 그거 네 잘못이라고들 말하더라는.
남성이 자신에게 쓰는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자와, 만나는 여성의 외모로 자신의 클라스를 증명하려는 남자를 끔찍하게도 경멸하는 나의 숨길 수 없는 표정까지 섞였으니 그 불편한 분위기가 상상할만 하다.
그는 곧바로 표정에서 주름이 사라지더니 동공이 몇번 진동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없는 자리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지만, 최소한 그런 행동으로 안주거리에 오르내리지 말았으면 해서 알려줬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로 사람마다 있는 그늘에 관한 대화가 한 두시간을 오갔다.
동정심은 아니었으나 '너도 힘들었겠다'는 말에, 그는 결국 막판에 울다가 잠이 들었고, 위자료 대상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제 아무도 없는 제 집으로 업히다시피 해서 들어갔다. 데려다주고 나와보니 그의 그늘진 바닥은 그네 넓은 집까지 덮친 듯했다.
어쩌다 보니 어느 시인의 말처럼 타인의 그늘을 읽었더랬다. 이처럼 남에게 드리워진 그늘을 읽는 것은 경우에 따라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다만 이 와중에 생각했다. 어쩌면 그에게 드리워진 그늘이 그에게는 그물이었겠다,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