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나는 지독한 무수저 출신이다. 듣기엔 다소 거북한 요즘 줄임말로는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 집안 출신이고, 조금 순화시켜서 말하는 사람들은 개천 출신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딱 그런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용이 된 것도 아니고 살림살이가 180도 변한 것도 아니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어 세금 낼 형편도 되지 못하는 가정이었고, 전기가 통하지 않아 밥을 보온할 수도 없었으며, 보일러에 기름이 텅텅 비어 있어 부디 보일러 소음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겨울을 보냈었다.
그게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대가 훌쩍 지난 90년대 말의 일이다. 덕분에 그 시기는 가난이 무엇이며, 그게 무슨 감정이 드는 일인지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장을 보러 나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온 몸에 돌풍이 관통한 듯한 약간의 쇼크를 느꼈다. 아, 코로나19 확진자도 아닌데.
약간 이런 느낌이었을까? ㄷㄷㄷ(절규-에드바르트 뭉크 작)
그것은 웬 가루우유봉지였다.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기생수 집 학생들이 저걸 나눠 받았었다. 그때 받은 거랑 똑같은 포장지의 가루우유봉지가 마트에서 내 눈에 보인 거다.
이거야 이거!!!
그 시절 나는 그 일이 제법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태어나기도 전 시대에 구호물품 정도로나 나올 법한 걸 받아들고는 책가방에 교과서 몇 권과 함께 욱여넣은 뒤 하교길 위에서 생각에 잠겼었다.
이게 몇 푼짜리라고, 얼마나 필요한 거라고 나눠주는지, 예산을 이렇게 쓰는 사람은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에 관해. 그런 별 도움도 안될 생각이나 하다가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만 기억이 난다.
집에 와서는 저걸 싱크대 찬장 구석에 쑤셔넣고 그대로 주먹을 힘껏 내리꽂았던 그날. 아직도 머릿속에서 선명하다. 가난이 대물림되던지 말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내 인생을 이렇게 개떡 같이 구질구질하게 살다 가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날이다.
그때 이후로 내 인생이나 형편이 얼마만큼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살이 덜 빠지는 걸 보니 밥을 굶고 다니진 않는 것 같은데, 여전히 인생에서 받고 사는 게 많은 삶이라서 말이다.
다만 분명히 다행한 일은 가난이라는 대상이 그토록 찢어죽일 만큼 원수 같은 감정으로 남아있어도 지금껏 내가 서 있는 자리, 즉 '신분'이나 '계층'이라고들 말하는 그 위치에서 선이나 최선과는 관련 없는, 그래 아주 정의로울 순 없다손 치고 설령 해악인들 상관 없는 개인의 이득에 불과한 선택을 좇는다거나 또는 그런 것을 위해 부나 힘을 가진 누군가의 어딘가를 핧으며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 또는 그렇게 우매하고 옹졸한, 구차하고 비루한 삶을 살지는 않아도 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 아닐까.
이렇게 몇 발자국 옮기는 찰나의 순간으로도 묻어두고 싶었던 기억이 터져 나와 상념의 홍수를 이룰 때가 다 있다. 황작가답게 짓궂은 말로 매듭을 짓자면, 저 봉지들을 풀어놓고 한 5분만 선풍기나 드라이어를 켜 놓을 수 없을까? 그러면 속이 좀 개운할 것도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