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넘어 느끼는 동지애
나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지만(어머니라 부른 적이 없다), 아버지의 호칭은 '진행형'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는 '아빠', 중학교 무렵부터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아버지', 지금은 '아부지'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광부'셨다. 어릴 적 기억 속 아빠는 시커먼 작업복 입고 방금 샤워를 마친 비누냄새에 담배향이 좀 나는 사람이었고, 어떤 어린이에게든 있는 그런 아빠라 여기고 살았다.
간혹 아빠 없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 시절 나는 그런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때의 나는 수염 거친 아빠에게 볼 비비며 살갑게 뽀뽀도 하고, 찌찌도 만지고,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지냈고, 그때의 '아빠'는 살가운 가족이자 믿음직하고 든든한 보호자였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고 한 두해 지나고 보니 '아빠'는 어디 '가고'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아버지는 우리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분이셨고 퇴근하고 소주잔을 곧 잘 기울이시는 분이셨는데, 그 뒷모습은 늘 '축 처진 어깨'였다. 이 무렵 아버지는 '석탄산업합리화'라는 것 때문에(이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잘 몰랐다) 광산들이 줄줄이 도산하여 광부 일을 더 이상 하실 수 없게 되셨고,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구점에서 가구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셨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에 진학할 때(그 무렵 아버지는 가구 배달일도 힘에 부쳐 그만두시고 마을버스 기사가 되셨다 )까지 나와 아버지는 그분의 호칭만큼이나 거리감 있는 사이가 되었다. 힘든 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그저 '가정 경제를 책임지시는 분'인 줄은 알겠는데, 뭐 크게 관심 없었다.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와 그 이유에 관해...
나는 나의 세상을 새롭게 그려 나가기에 바빴다. 아니, 그런 고상한 생각을 하며 내 머릿속 세계에 갇혀 있었다. 내 손에는 워크맨, 내 귓가에는 'Nirvana'.
대학에 가서는 밤새 술 퍼 마시는 아들이었고, 종종 아버지를 피해 다니곤 했다. 새벽에 이른 출근을 하시는 아버지를 비틀거리며 마주친 그날 이후로.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정신을 잠깐 동안 바짝 차렸을 '02년 ~ '03년까지도 '아버지'셨다가 내 뱃살이 1인치씩 늘어감을 느낄 때, 얼굴에 '뽈살'과 '두 턱'이 생겨날 즈음.. 아버지 생신을 맞아 문득 '아부지'하고 부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돌아보니, 아담한 노인이 생일 케이크를 '호~'하고 불고 계셨다. 헤어스타일은 카푸치노 수도승 스타일(속이 빈)..
용돈이며 선물드리면 좋아하시며 "느그 엄마 돈 주지 마라. 엄마한테 돈 주믄 나 한텐 안 줘~"라고 농도 하시고 젊어서 곧 잘 드시던 소주도 끊으신 할아버지, 맛난 생일상도 고기 몇 점 드시면 그만이신 노구의 그 할아버지 말이다.
요즘 아부지가 여기저기 고장이 나셔서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신다. 스텐트도 하시고 방광 종양 수술도 하시고, 뭐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
우리 '아빠'는 씩씩하고 힘센 사람이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힘이 들어도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멋진 분이었는데, 지금의 '아부지'는 어느새 노쇄한, 자식들이 돌보아야 하는 분이 돼버리셨다.
아부지는 젊은 시절 가족들 건사하시며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탄광 막장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조차 폭파용 탄약을 들고 수백 미터 갱도를 내려가셔야 했을 때는 또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셨을까? 홀로 소주 들이키시며 삼키신 괴로움은 또 얼마나 될까? 아들놈 대학 갔다고 좋아했더니 '술 쳐 X고' 동네를 뺑 둘러 자신을 피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내 아이들 기준으로 아직 '아빠'인 나도 벌써 삶의 무게에, 사람 대하는 어려움에, 희망하는 것들의 좌절에 아프고 버거운데, 아이들 잘 못 챙기고 있지는 않나 하고 늘 노심초사하는데..
무엇보다, 우리 아부지도 나처럼 아버지가 처음이셨을 텐데..
마흔 넘어 뒤늦게 느끼는 '동지애'에 가슴 먹먹하다..
아이고~ 아부지~!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