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하다'라는 우리말은 '아깝다'나 '안타깝다' 보다는 크고, '노엽다'나 '분하다' 보다는 작은 말이다. 나아가 이 단어는 외국어로는 좀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섭섭하다를 어느 나라 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느낌 그대로 번역해 낼 수 있겠는가?
섭섭함의 느낌은 이 글을 짓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독자들이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는 있되,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할 길 없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그 '감정' 말이다.
우리 생(生)의 길에서 곳곳에 널려있는 것이 이 섭섭함이다.
뜻한 바 이루지 못해 섭섭하고, 내 맘 몰라주는 이에 또 섭섭하다.
곱씹어 보면 우리 삶 속에서 기쁨의 영역(행복, 즐거움, 환희 등)을 제외하면 절반이 섭섭함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으로 치환되게 마련이므로, 생을 되돌아보면 기쁨의 영역에서 남는 것은 '추억', 반대편에 남는 것은 '섭섭함의 기억'이다.
'분노', '노여움', '슬픔', '외로움' 등은 신기하게도 시나브로 '섭섭함'에 수렴하게 마련이니까.
이 땅에 숨 쉬는 이들에게 무소유를 일깨워주신, 구체적으로는 무소유를 통한 삶의 기쁨을 알게 해 주신 법정스님의 숭고함에서도, 귀에 에어팟 꽂고 고급차 타는 풀소유 그 '스'(스님이라 하기엔 좀 그런 그 양반)가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던 그 행복의 비결에서도 늘상 설파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바라지 않는' 것이 생의 고통이 발원하지 않게 하는 비책이라는 것은 어쩌면 진리일지 모른다.
내 삶을 돌이켜, 찬찬히 곱씹어 보면 섭섭함의 그 모든 순간, 섭섭함의 전제는 항상 '바람'이었다.
그래, 바라는 게 있으니 섭섭하다.
오늘도 우리는 이 생의 길을 걷는 이 찰나의 순간에도 기뻤다가 슬펐다가, 울다가 웃다가 하며 조울(躁鬱)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기쁨은 오래 곱씹지 않는 인간, 결핍의 본성을 갖는 우리들을 떠올려 보자면, 섭섭함이 도처에 있는 그 '섭섭로(路)'가 인생길이 아닌가 한다.
오늘,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는 이 짧은 여정에서 그 섭섭함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걷어내는 노력을 해보려 한다. 바라는 게 있으니 섭섭한 이 길, 조금 덜 바라고, 조금 덜 조바심 내서, 그래서 조금이나마 더 기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정신 한번 꽉 붙들어 보기로 한다.
세파에 홀려 정신 줄 놓게 될 때, '짧은 생 뭘 그리 바라고 바래서 굳이 섭섭함을 채우려는가?' 하고 잠깐이나마 각성의 시간을 갖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