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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May 13. 2023

멀어져도 다시 다가오는 파도처럼,

#19. 토요일, 저녁 7시

민아, 선우, 연희. 셋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별난 성격의 소유자도,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도 없는 세명의 여행은 한 사람이 말하면 둘은 자연스레 따르는 모양새로 편안한 휴식이 될만한 여행이었다.


다만, 흥이 많은 민아는 선우, 연희 두 사람을 두고서 종종 사라지곤 했다는 것만 빼면.


가는 관광지마다 빨간 말 등대가 이뻐서, 하얀 풍차 해안도로가 이뻐서, 영화 촬영지 카페라서 등등의 이유로 민아는 셀카를 찍겠다며 선우, 연희 둘만을 남겨두고 종종 사라졌다.


민아가 사라질 낌새가 보이면, 선우도 덩달아 일어나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사진사를 자처했지만, 민아는 한사코 말렸다.


"선배가 찍어준다고 하면, 그 앞에서 내가 편하게 포즈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나 혼자 내버려 두는 게 날 돕는 거야."


"아~. 그렇게 되는 거야?"


선우는 민망함을 감추며, 그 후론 조용히 연희 옆에 앉아있는 것을 택했다. 연희와 그동안 못 나눴던 대화들, 궁금한 이야기들을 속시원히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바다만 바라보는 연희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선우는 당차게 묻지 못했다.


어쩌면, 앞선 만남들에서 자기에게 왜 그렇게 들이댔냐고 따져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그마저도 묻지 못했다.


말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연희를 보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연희가 웃었으니까.


간간히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오면 선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선우가 정작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 내면에 있는 토로하지 못한 그 마음들을 받아내고 싶을 뿐이었다.


여행을 와서 신나는 가운데서도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볼 때나,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그녀의 눈에서 깊은 설움과 슬픔이 간간히 스쳐 지나갔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 눈빛을 캐치할 때의 선우는 어쩔 줄 몰라 바지에 똥 싼 아이처럼 주춤거렸다.


3박 4일 일정의 여행이 별다른 일없이 무난하게 흘러 목요일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마지막 휴식을 가지려 할 찰나였다.


선우가, 혼자인 방이 적적하지 않게 TV를 켜고 샤워를 하려고 속옷을 챙기는 사이에, 민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뭐 해?"


"어? 이제 샤워할려고..."


"드뎌, 마지막 날 밤이네. 언니랑은 이야기 많이 했어?"


"뭐, 그렇지 모."


"뭐야? 내가 어떻게 만들어준 자리인데, 설마 그 시간들을 모두 헛되이 보낸 건 아니지?"


"아! 그런 거였어? 어쩐지 자꾸만 사라지더라니. 하하하."


"지금 그렇게 속좋게 웃을 때야?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선배는 그 반이라도 따라와야지. 뭔가 진전이 좀 있어야 는 거 아니냐고?"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여튼, 지금 언니 혼자 바람 쐬고 오겠다고 바닷가 쪽으로 산책 나갔어. 제발, 사고라도 좀 쳐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어, 혼자 나갔다고? 알았어. 일단, 끊을 께."


선우는 캐리어에서 샤워하려고 꺼내놓은 속옷을 도로 넣고서, 흰 티 위에 체크무니 셔츠를 다급하게 걸쳤다.


빠른 걸음으로 호텔 로비를 지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호텔 앞쪽 산책로를 따라 바닷가로 난 길을 걸으니, 저 멀리 해변가에 앉아 있는 여인 한 명이 보였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실루엣임에도 작은 어깨를 둥글게 웅크린 채 홀로 처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연희임을 한눈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연희에게 다가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혼자 두기에는 왠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시가 넘은 시간이라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가 모래사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간간히 호텔 투숙객처럼 보이는 연인이나 가족들이 둘씩 혹은 삼삼오오로 무리지어 해변가를 산책하는 정도였지만, 연희처럼 혼자 모래사장에 버려진 듯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우는 연희가 모래사장 위에 만들어 놓은 듯한 발자국을 따라가 연희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연희는 저녁 미풍에 살짜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라도 할 듯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돌려 선우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알고 나왔어?"


"어, 민아가 너 혼자 나갔다고 걱정하길래..."


연희 옆에 조용히 어깨 맞춰 앉으며 선우가 대답했다.


"민아도 참. 내가 뭐 어린아이도 아니고..."


"하하. 그러게 말이야. 민아가 널 너무 아끼는 거 같아."


이렇게 짧은 대화가 오가고는 다시 끊겼다. 연희는 바다만 바라보았다. 바다에 찰랑이는 파도를 깊고 둥근 두 눈에 다 담은 채로.


찰랑이는 검은 바다와 까만 밤하늘의 경계가 사라져 하늘에 별이 없었다면,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없이 검은 슬픔이 서려있는 바다와 하늘을 연희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서 반짝 빛나는 것은 눈물인지, 눈에 비친 별빛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여행은 즐거운데, 즐거울수록 자꾸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네."


"왜?"


"엄마는 아빠 병간호하느라 병실에만 갇혀 지낸 지 1년도 훨씬 더 넘었어..."


"그랬구나. 어머니도 너도 고생 많았겠다..."


"......"


연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대신, 연희의 머리가 살짜기 선우의 어깨 위로 넘어왔다. 연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선우는 감히 연희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바닷가의 연희를 찾아 나오면서, 오늘이 만난 지 일 년이 되는 날임을 그녀에게 상기시키며 그들의 만남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병원 생활 1년도 더 된 묵은 슬픔을 간직한 연희에게 만난 지 1년이라는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은 제 아무리 눈치없는 선우라 하더라도 지금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평안이 될 위로의 한 마디가 더 필요한 순간이니까...


그러나, 생각만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선우도 바다만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의 개수를 세는 듯 둘 사이의 침묵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 까? 선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어릴 적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주부였던 엄마는 매일 울기만 하셨지."


"꼬맹이 선우도 고생이 많았겠네."

연희가 새침한 목소리로 민요 한소절을 부르듯 애달픈 가락을 실어 답했다.


"그런 엄마한테 내가 뭐랬는 줄 알아? 어려서, 아버지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거든. 그저, 나는 엄마에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어. 울고 있는 엄마에게 배 고프다고, 그만 울고 밥달라고..."


"어렸으니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지. 그 후로, 엄마는 내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셨어. 나 몰래 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휴, 꼬맹이 선우가 큰 일 했네."


"아마, 그런 게 부모님 마음이 아닐까 싶어. 당신은 슬프고 힘들어도, 자식만은 그 슬픔을 모르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자식이 아무리 어려도 부모에게는 버틸 힘과 의지가 되는 마음.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겠지? 그런 마음으로 울 엄마도 이번 여행을 허락한 거겠지? 그런 마음으로 버티고 계신 거겠지?"


"그러실 거야. 그러니, 너무 마음 무겁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즐겨. 그래야, 어머니도 맘 편하실 거야. 대신, 어머니의 힘듦도 조용히 잘 헤아려 드리고."


"선우, 다 컸네? 언제 이래 컸지?"


연희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한번 쓰윽 쳐다보고선 이내 선우 머리를 쓰다듬는 듯 하다가 장난스럽게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선우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그런 선우의 반응이 재밌는 건지 이내 맘이 편해진 건지 다시 선우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어 가벼운 소리를 내며 잠시 웃었다. 도시에서 보던 밤하늘과는 달리 유독 까맣던 밤하늘에 수천, 수만 개의 빛나는 별들이 연희의 웃음소리에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웃음소리에 별빛이 퍼져 보여서 선우에게는 까만 밤이 하얗게 빛났다. 연희의 슬픔이 자신의 모습과 낯설지 않아서, 연희가 자신을 싫다고 해도 영영 연희 곁에 머무르고 싶어질 까봐 두려울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밤이었다.


까만 어둠이 덮친 모래사장 위에서 우두커니 홀로 억 겹의 슬픔과 미안함에 젖어들던 연희에게 자신의 작은 어깨 한 켠이라도 내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선우와 그 따뜻한 어깨에 기댄 채 오늘 밤은 편안한 잠에 빠져들 듯한 연희.


해안가 모래사장 위를 가득 채우며 밀려와 하얀 거품이 되어 사그라지는 파도 소리가 하얗게 총총 빛나던 별빛과 오묘한 하모니를 만들어 이 밤은 더욱 하얗고도 더욱 따스하게 깊어만 갔다.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던 두 사람의 사연들은 이해와 공감으로 하나되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통의 이야기로 서로의 마음에 가닿았다.


무수히 많은 하얀 거품을 만들어 두 사람에게 다정하게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선우가 드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일 년 된 거 알아?"


어깨에 기댄 채 말없던 연희가 스프링에 튕긴 것처럼 머리를 곧게 세우며, 놀란 듯 선우를 쳐다보았다.

"헐, 벌써?"


선우는 그런 연희와 애써 눈 맞추려 하지 않고서, 다가왔다가 말없이 멀어져 가는 파도만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어. 내년 이 맘때에도 우린 이렇게 만나고 있을까?"


뒷걸음질 쳐서 사라지는 파도처럼 연희의 말꼬리도 슬며시 사라졌다. 

"글쎄..."


선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가왔다가 하얀 거품이 되어 멀어지는 파도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가올 것 같다가도 다시 저만치 멀어지는 파도지만, 피하지 않고 그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결국은 파도가 다가와 자신의 발이든 신발이든 그 무엇이든 적시며 자신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파도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연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멀어졌다가 자신에게 다시 다가오는 파도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저만치 멀어질 것만 같다가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는 파도라서, 피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알게 모르게 서서히 젖게 만들어 결국엔 파도와 함께 바닷물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아! 이젠 춥다. 들어가야 될까 봐."


"그래."


선우는 자신의 체크무늬 셔츠를 벗어 연희의 어깨를 덮어주고선 한 손으로 연희를 잡아 일으켰다. 몸에 밴 다정함으로 연희 바지에 묻은 모래를 먼저 털어주고, 자신의 바지도 털면서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젖은 발이 모래사장 위 호텔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처럼 확연한 네 발자국을 남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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