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18일 차는 일요일이었다. 오전에는 동네 교회를 다녀왔을 테고, 오후에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민박집에만 머무르는 것만은 또 심심했다. 지금은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홀로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는 낯선 이를 만났다. 그는 스포츠카를 렌트해서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에게 차가 있었기에 늘 처자 둘이 걸어서 볼 수 없었던 것을 과감히 보기로 했다.
우리가 밥을 사기로 하고 그는 해안가를 드라이브 시켜주기로 했다. 드라이브 코스로는 우리가 있는 화순 해수욕장 인근의 민박집에서 송악산을 올랐다 돌아오는 코스. 산의 풍경은 너무나도 좋아했지만, 이미 한라산 등반 후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던 우리는, 다음 날의 걷기를 위해서 이 여행에서 더는 등산하지 않기로 했다.
더군다나, 낯선 이를 만난 시간은 저녁 무렵.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스름이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낯선 이는 홀로 여행하는 만큼 말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보다는 조금은 나이가 어린 청년이었는 데, 왠지 어른스러웠다. 여름휴가로 홀로 제주도를 여행 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곧 홀로하는 여행을 즐긴다는 그 맘이 이해되기도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맘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홀로가 좋지만 뭔가 가슴 뭉클하게 인상적인 풍경을 바라볼 때면 함께 바라볼 이가 있었으면 싶고, 또 둘이 함께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게 될 때면 조금은 거리를 둬서 혼자 있고픈... 아마 이 청년은 그런 상태를 즐기는 게 아녔을 까 싶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제주도의 푸른 밤이 짙푸르다 못해 칠흑같이 까만 밤이 되었고, 해안가를 유유히 달리던 스포츠카 안으로 적절히 시원하면서도 차갑지 않은 바람이 불어와 세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헝클어 놓기도 했다. 서로 낯설어서 오가는 대화는 별로 없었지만, 기분을 적당히 띄워줄 음악이 흘러나와서 어색한 빈 공간을 메워 주었다. 세 사람의 심장은 머리를 헝클던 바람의 리듬 따라 뛰고 있었고, 이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할 게 없어서 가벼워지던 마음이 조금씩 행복감에 취하고 있었다. 차는 송악산 언저리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멈췄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출처:자람스튜디오>
산책로를 따라 산 쪽으로 방향을 정해 걸어 올라갔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세 사람의 입에서 곧바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전날 비 오고 안개가 걷혀서인지 맑은 밤하늘의 별들은 산등선 위로 곧바로 떨어질 듯, 쏟아지고 있었다. 별빛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라는 노래가 이래서 나왔구나 싶을 정도였다. 산을 오르다 말고, 하늘만 바라봐도 산을 다 본 듯 뿌듯하고 마음이 즐거웠다. 산에서 바다를 향해 바라보면, 수평선까지 총총 박힌 별들이 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어서 물 반 별 반인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이뻐서 그냥 멍~하니 별만 바라봤다. 물멍이니, 불멍이니 하는 말처럼, 난 이때 처음으로 별.멍을 경험했다.
그 낯선 이와는 어떻게 헤어졌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동상이몽처럼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바다를 보면서 서로 다른 대상을 떠올렸을 것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했겠지만, 이쁜 별 때문에 분명 마음 한 켠에는 행복감이 차올라서 셋 다 어쩔 줄 모른 채, 그 풍경만 고스란히 마음에 담았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
그 풍경을 꼼꼼히 마음에 다 담을 즈음에야 헤어져서, 서로 내일의 여행을 채비하러 조용히 숙소에 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우리는 어젯밤 드라이브하면서 보았던 해변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별멍으로 행복감을 선사했던 어제 저녁과는 달리 날씨가 조금 불안했다.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검색해보니,
우리는 별이 깜빡거리는 횟수에 따라 그다음 날 날씨를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별이 깜빡거리는 횟수가 많은 것은 상층 대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일 날씨는 흐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출처] 밤하늘의 별이 깜빡거리는 이유는? |작성자 나(네이버 블로그)
(좌) 조각공원 입구 하귤나무, (중) 조각공원에서 가장 맘에 들던 작품불새, (우) 구름 낀 산방산의 모습
아! 기억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마라도를 가기 위해 여객선 터미널로 가는 길에 조각공원을 들렸다. 조각공원 입구에선 이중섭 화백의 그림에서나 봤음직한 귤나무가 입구에서 우릴 반긴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화백의 그림 같았으려나? 여객선 터미널 가는 길에 만나는 공원도 산도 모든 것들이 희뿌옇다.
산방산 둘레를 감싼 저 구름들은 결국 비가 되어 내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저 구름들... 때론 구름이 되고, 때론 비가 되고, 때론 바다가 된다. 어느 모습이 진짜 일까?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고민하는 사이, 모슬포항의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어젯밤에 보지 못했던 해변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영애를 일약 한류스타로 등극시킨 드라마 <대장금>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고도 한다. 하루 4번(요즘에는 배편이 하루 8회인 듯)만 운항되어서 배차 간격이 여유있으니, 시간이 조금 남아 선착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본다. 이영애가 너무 여리여리하니, 나는 도저히 장금이가 되지 못하고, 남자 배우가 되어서 배 타고 떠나는 장금이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흉내 내 보는데, 여행 중 뜻하지 않게 걷기 운동도 하게 되고, 밥도 잘 먹으니 더 튼실해져서 남배우 역할마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그저 타잔처럼 보인다.
(좌) 대장금 마지막 장면 흉내내기, (중) 마라도행 배, (우) 마라도 가는 중 - 바다조차 흐리다. 저 멀리 가파도가 보인다
그 타잔의 음성을 들었는 것인지, 배가 도착하고 우리는 배를 탔다. 갑자기, 일렁이며 파고가 높아지더니, 이내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 따라 파도 따라 배는 이리저리 상하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속의 장이 꼬이기 시작했고, 점심때가 다 되었지만, 아직 건더기 있는 것으로 채우지 못했던 내 뱃속도 파도 따라 출렁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멀미다.
짜장면 시키신 분~!!
이라고 외치며, MC 이창명 씨가 짜장면 가방 들고 나를 찾아와 주길 기다렸다.
짜장면 시키신 분~!!은 핸드폰이 상용화되기 시작했던 90년대 후반 017 통신사 유명 광고이다. 울릉도 바닷가에서 조각배를 타고 열심히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고 외치며 주문자를 찾는 데, 사람도 인기척도 없다. 급기야, 배에 물이차기 시작한다. 절박하다. 그때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 "미안한데 말이야, 내가 마라도로 옮겼어."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김국진씨.울릉도에서 마라도까지 전국 어디든 잘 터진다는 파워텔레콤의 진수를 보여주는 광고였지만, 이 광고는 나에게 마라도는 짜장면이라는 것을 각인시킨 듯했다.
광고를 기억하면서 울렁거리는 배를 잡고 목 터져라 이창명씨를 불렀다. 상상 속에서. 하지만, 마라도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그는 오지 않았다.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25분 정도는 배 멀미하느라 어찌 마라도까지 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고 오로지 짜장면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채로 선착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그제야 간판이 소리친다.
짜장면 시키신 분~!!
(이게 진짜 있는 거였어?)
(중) 2005년 당시 마라도 짜장면집의 모습, (우) 2022년 현재 출처:허니이니의 제주표류기 블로그
마라도서 왜 짜장면을 먹는지 그날알게 되었다. 이창명씨가 CF에서 "짜장면 시키신 분~"을 너무나도 애타게 불러서 내 머릿속에 마라도=짜장면이라고 각인된 탓도 있겠지만, 뱃속을 비워두면 이렇게 뱃멀미를 하게 되니까... 짜장면이 일반 육지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해물이 위주가 되어 색다른 맛이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멀미가 반찬이었는지 한 그릇을 눈 깜짝할 새 뚝딱했다.
선착장에서 얼마 걷지 않으면, 짜장면 집뿐만 아니라 학교(이 당시 폐교 상태, 현재는 아예 사라짐)든, 교회든, 심지어 제주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던 복지회관(현재는 소방서)까지 아담하니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실로 소인국에 온 듯 신기하다가 사방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드디어 진짜 섬에 온 듯 제주 큰 섬에 있을 때와는 마음이 또 달라졌다. 곳곳에 푸른 풀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더욱 섬 같아 보이게 했다.
제주도도 섬이긴 하지만, 내 시야를 벗어날 만큼 크니까, 제주도에 있어도 섬에 있다는 느낌은 적었다. 그냥, 여느 해안가에 있는 느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라도에서 바다를 둘러보면, 정말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게 보여서 섬에 있음이 느껴져 너무 좋았다. 또한, 바위에 앵겨붙는 파도가 너무 좋았다. 파도가 없었으면 외로웠을 바위. 아니, 이 섬이 없었으면 파도가 외로웠을 듯 느껴졌다.
바다는 또 왜 그리 파란지... 최남단비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짜장면으로 배를 채우니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체류시간이 2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초록 벌판에서 야생마처럼 펄떡이며 더 있고 싶었지만, 배낭이 짐이 될까 봐 여객선 터미널에 맡기고 와버렸기에(이 당시만 해도 락커가 없어서 매표소에 맡기고 왔었다.)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강한 충동을 직원이 퇴근하기 전에 다시 찾으러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겨우 달랬다.
마라도의 추억은 우리 뱃속에만 남긴 채, 아쉬움을 가득 안고서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배에 승선해야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한껏 성나 있던 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서 한껏 명랑해져 있었다. 가기 전보다 짙푸름이 청량하게 바뀐 바다로 인해 뱃속을 채운 나도 멀미를 하지 않으니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