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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미친 X?

- 도보 여행하다 욕먹기는 처음이라...

by 해야블라썸 Nov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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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차 : 모슬포항 ~ 고산육거리~절부암(용수항): 올레 11~12코스



 잔뜩 흐린 하늘에 잔뜩 흐린 바다. 바다는 물빛에 하늘색을 담는 듯, 비 오는 날에는 하늘색뿐만 아니라 바다색도 변했다.

마라도 여행  후 모슬포항 인근에서 머물렀던 우리는 모슬포항을 시작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날도 비가 내렸다. 올레 11~12 코스에 해당되던 이 해안가에는 모래 해변보다는 유독 검은 바위들이 많았던 구간으로 기억이 된다. 검은 바위로 겁 없이 밀려오던 회색 빛깔 파도는 옥빛 거품으로 검은 바위를 감싸 안았다가 하얗게 사라져 갔다. 비가 내려서 우산을 쓴다고 썼지만, 바람 방향 따라 날리는 비를 피할 재간은 없었다. 무엇보다 발길에 차이는 빗물들은 어느새 운동화를 적셔서 질퍽거리는 불쾌한 운동화를 나에게 선물(?)했다.


비가 내리면 바닷가엔 아무도 없을 줄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변가에서 낚시하는 사람이며, 이 정도 비는 가볍다는 듯이 여전히 파도를 가르고 지나가는 어선은 우리에게도 비가 와도 평소처럼 여전히 걸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육지의 일부였던 바위들이 비가 오고 물이 차서 점점 바다가 되어가고,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들리던 파도소리. 해안가 주변 바위 틈새 풀들이 바람결 따라 일정 방향으로 쓰러지는 모습들 하나하나 사진으로 보고 있노라니 비는 왔지만, 그날의 나는 행복했다. 차라리 비가 와서 뙤약볕 아래서 걷는 것보다 축복이었고, 은혜였고, 감사였다. 축축한 운동화로 걷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터였지만, 그 기분은 오로지 발에만 머물러, 더 이상 발목을 넘어, 무릎을 넘어 내 기분이 되도록 올라오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뭔가 하나 더 손에 들어야 하는, 비에 젖는 느낌이 불쾌한, 때론 물에 젖은 시멘트의 따가운 냄새가 뒤섞여 올라오는 귀찮고 불쾌한 날에 불과했지만, 이 여행을 통해서 느끼는 비 오는 날은 시원한 바람 촉감과 청량한 바닷 사운드를 동시 체험할 수 있는 한없이 감사한 날이었다.  

(중) (우) 4,000원짜리 정식(2005년 당시)   

걷다 보니, 남제주에서 북제주의 경계선을 넘는 짜릿한 순간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이제 처음 시작했던 원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일 테다. 경계를 넘어 점심에 가까워질수록 비는 흔적을 감춰, 오히려 더욱 걷기 좋아졌다. 조금씩 배가 고파왔고, 여섯 개의 갈래길이 보이는 육거리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고산 육거리. 내가 사는 지역에서 오거리는 봤어도, 육거리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기억에 더 남는 것은 식당이었다. 12반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갖가지 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져 나오고, 심지어 후식으로는 요구하지 않아도 계절 상관없이 따뜻한 자판기 믹스커피가 아닌 아이스커피가 제공되던 센스 만점의 식당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센스 있던 서비스는 정식 4000원이라는 가격이 아니었을 까 싶다. 이 당시 서귀포 중문에서 돌솥비빔밥 가격하나 가 8~9,000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절반 가격에 이 정도로 반찬 가짓수가 많다는 것은 정말 거저먹는 느낌이랄까?


입이 짧아서 사실 안 먹는 반찬이 더 많기도 했지만, 집 떠난 지 20일이나 되던 여행자에게는 엄마 손맛이 그리울 때였고,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집밥처럼 푸근한 정감 있는 반찬들이 엄마가 차려준 밥상처럼 느껴져 그저 반찬만 바라보아도 배가 부를 듯했다.


근데, 실제로는 식사보다도 우릴 더 배부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술 취한 아저씨에게서 얻어먹은 욕 덕분(?)이었다. 대낮부터 거하게 한잔 하신 아저씨는 우릴 보고 두 여자 각자의 자리 옆에 놓인 큰 배낭가방을 쓰윽 쳐다보시더니 한여름에 뭐하는 짓이냐며 "미. 친. 년. 들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걷다 보니 일순간 미친 년. 이 되어버렸다. 이 여행 중 이런 홀대는 처음이기도 했고, 그동안 받은 갖가지 친절로 제주도에 대한 이미지는 최상 별 5개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이 아저씨 때문에 제주도 이미지를 구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욕은 하셨지만, 우리의 행색을 보아 여행자인 걸 짐작하신 아저씨는 여기서 바다가 보이는 쪽 마을로 가면 경치가 그리 좋다고 정보도 주셨다.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혀의 뻣뻣함이 신뢰감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다 들은 우리는 아저씨가 가르쳐준 대로 기대감을 품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짙은 갈색의 광활한 밭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을이 나타났다. 여태껏 봐왔던 해변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요트도 보여서, 조금은 사는 동네구나 싶을 정도였다. 바다에는 어선들이 많았고, 나란히 정박해있는 배들이 다소 정겨워 보였다. 비에 젖어 운동화는 질척거렸지만, 해안가는 너무도 가지런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라 금세 기분이 상쾌해졌다. 정박한 배들을 보니 비가 와서 출항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집어등이 빼곡한 어선들이다. 까만 밤이 되면 활동을 시작할 오징어잡이 배.


(좌)2005년 여행당시 찍은 집어등이 보이는 어선, (우) 출처:https://blog.naver.com/chansung405501

낮엔 투명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지만, 밤엔 열정으로 타올라 바다를 밝히고 고기떼를 부르는 집어등. 여기에 불이 켜지고, 까만 밤바다를 밝히면 멋진 조명이 되어 과히 물고기를 꼬실만하다. 검색을 해보니 주로 이 동네는 한치잡이를 많이 하는 곳인 듯하다.


출처:https://blog.naver.com/chansung405501

이쁜 마을의 풍경에 빠져서 얼른 민박할 집을 찾고 씻은 후, 다시 한번 동네를 거닌다.


강과 바다가 만난다는 포구로서 뿐만 아니라 동네의 아름다운 풍경 속 절부암이라는 바위로도 유명한 동네다.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조난당한 남편을 기다리다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조선시대 말기 고씨 부인의 비통한 사연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에 그동안 찾지 못했던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하여 이를 신통히 여긴 고종이 이곳을 "절부암"이라 칭하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남편이 죽었다고 따라 죽는 조선시대 여성의 심정을 21세기를 사는 나로서는 사실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나라면, 남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내려 한 톤 더 정제된 듯한 이 바위가 있는 우거진 숲의 초록이 상쾌해서 미친 X이라는 욕도 한없이 가볍게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오전에는 비로 질척거렸고, 걷다 보니 미친 ㄴㅕㄴ 이 되어서 욕으로 배도 채웠지만, 마무리는 깔끔했던 하루. 낯선 곳의 여행자에게는 술 취한 아저씨의 주정마저도 소중한 정보가 될 때가 있다. 그래도, 술은 저녁부터 시작하는 걸로 합시다~^^    






싸이월드 기록에는 <고산 육거리 식당>이라고 적어놓았는 데, 메뉴판 사진에는 <오름과 바당>이라고 적혀있어서 추억찾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힘들게 검색해 봤다.


먼저, <오름과 바당>이라는 명칭이 메뉴판에 적혀있으니 더 신빙성이 있어서 검색해보니, 위치를 옮긴 것인지, 아니면 영 다른 가게인지, 가게는 있지만 한라산 내려오는 중턱에 맛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메뉴를 보니 내가 들렀을 때의 그 메뉴랑도 비슷하고 가게의 역사가 20년이 되었다고 하고, 반찬에 나오는 야채들은 주인장이 직접 키운 것이라고 하니,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한데, 위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한, 그 시절보다 가게가 조금은 고급스러워지고 규모도 커져서 식당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동일한 가게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지만,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는 맛집이라는 게 좋다. 다음에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한 번은 다시 들러보고 싶은 식당이다.


 싸이월드에 기록된 대로 <고산 육거리 식당>이라고 검색하면, 또 진짜 그런 간판을 단 식당도 있다. 근데, 메뉴가 많이 다르다. 그냥 (흑돼지)고기구이집이다. 위치상으로도 이름으로도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메뉴가 너무 다르니 확신할 수가 없다. 부디, 두 가게 모두 동일한 사장님 가게면 좋겠다. 예전 내가 방문했던 사장님의 서비스가 너무 좋아서 맘껏 돈 벌어 가게를 하나 더 오픈한 쪽으로 기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비스가 뛰어나고 맛이 좋은 가게는 사장님의 열심만큼 어떤 가게이든지 번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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